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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81125 감사는 어디에서 오는가? (누가복음 17장 11절 – 19절) 조회수 : 838
  작성자 : 교회사무실 작성일 : 2018-11-23

신앙이란 감사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모든 순간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힘에 부치는 고통을 당할 때도 마음으로부터 감사할 수 있을까? 나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 같이 여겨질 때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었다고 해도 힘든 상황 속에서 감사의 고백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감사는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 은혜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 나온다.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Ⅰ. 절망과 믿음

사마리아인은 불평과 원망이 존재 이유의 전부였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수없이 저항했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나병이 걸리기 전에도 핍박받고 괄시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나를 개나 돼지같은 불결한 짐승처럼 여겼습니다. 나와는 대화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병까지 걸리는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이제 내 삶은 끝났습니다. 내게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세상을 향해서 불평하고 저주하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당시에 나병은 아주 나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천형, 극형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나병환자는 철저히 사회와 단절되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이별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 곁에 다가설 수도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나는 부정합니다, 나는 부정합니다” 외치며 자기의 부끄러움과 부정함을 선포해야했다. 그것도 침이 튀지 못하게 입술을 가린 채로 큰 소리로 외쳐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나병에 걸린 환자들은 얼마나 자기의 처지를 통탄했을까? ‘나는 버림 받은 존재다. 왜 내게 이런 천형이 주어진 걸까? 건강했다면 멋지게 살았을 텐데, 이제 나는 불평과 원망, 세상을 저주하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Ⅱ. 치유와 감사

갑자기 그에게 기대와 소망이 생겼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이 가까운 동네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예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그는 그저 멀리서 예수님께 부르짖을 뿐이었다. 곁에 있었던 아홉 명의 유대인 나병환자들도 한 마음이었다. 질병과 고난 속에서는 지위고하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차이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지금까지 소리 냈던 그 어떤 순간보다 더 크게 소리 질렀을 것이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우리는 바닥인생입니다.’ 이런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구하는 이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열 명의 나병 환자들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소망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전폭적인 신뢰로 반응하였다.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자리를 떠난 것이다. 말씀대로 순종한 것이다.

열왕기하 5장에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나병환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스라엘에서 붙잡아 온 한 여종으로부터 이스라엘에 사는 능력의 선지자 엘리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장군은 군대를 거느리고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저 하인을 시켜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을 전할 뿐이었다. 그는 엘리사의 반응에 몹시 화가 났다. “내 고향에 이 요단강만한 강물이 없어서 내가 여기까지 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란 말인가?” 돌아가려고 하던 그 때, 옆에 있던 종이 장군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주인이시어, 아니 이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부탁했어도 들으셨을 것 아닙니까? 그냥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몸을 씻으라고 하는데 왜 이걸 안하시려 합니까?” 나아만 장군은 ‘내게 믿음이 없구나. 신뢰함이 없구나.’ 그리고는 겸손히 엘리사가 말한 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었다. 결국 그는 깨끗하게 나음을 입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에 대한 믿음이 부분적일 때가 많다. 전적으로 맡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순종하기 보다는 자꾸 판단하고 있다. 예수님께 내 문제를 그대로 아뢰고,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하겠다는 열망이 있어야 우리 속에 생명의 사건, 치유의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Ⅲ. 영혼의 치유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사마리아인이었던 그는 몸이 깨끗해진 것을 알고 한 걸음에 예수님께 찾아와 엎드렸다. 그리고 감사의 고백을 드렸다. 물론 나머지 유대인 아홉 명도 감사했을 것이다. 그들은 몸이 치유된 것, 즉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했지만, 그 큰 선물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예수님은 안타깝게 여기시며 말씀하셨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치유 받은 사실만을 기뻐하고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으면 그 변화는 축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내용만 좋아하고 그것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그것은 참된 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나머지 아홉을 찾고 계신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몸이 고침 받은 것을 기뻐하고, 그 순간 이것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기억했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왔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몸이 치유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며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이다. 삶의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기쁨의 순간에 예수님을 기억하고 찾아온 사마리아인을 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의 행동을 믿음이라 인정하시고 그에게 구원을 선언해주신다. 그는 몸만 아니라 영혼도 구원을 받았다. 참으로 복된 삶이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첫 번째 단계인 ‘나는 불평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머무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인생을 헛되게 사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인 ‘나는 소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변화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 번째 단계인,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주신 이 세계에 감사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라는 고백이 날마다 일어나야 한다.

무정한 시대다. 왜 이렇게도 험한 세상이 되었는가? 감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감사는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요 내 이웃의 존재를 긍정하는 일이다. 인생을 낭비하며 살지 않으려면 내게 주신 삶의 모든 것 하나하나를 떠올리면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노래 부르게 하시고, 우리 육체에 건강함 주시고, 기쁨이 가득한 생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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