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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기동석 김정심 목자 목녀님을 소개합니다 | 조회수 : 782 |
작성자 : 이종관목사 | 작성일 : 2018-01-11 |
기동석 김정심 목자 목녀 간증문
안녕하십니까? 저는 박진수 목장에서 분가 하게 된 기동석입니다.
분가하면서 받은 하나님 사랑을 나누어 볼까합니다. 부족하지만 시작하는 목장을 축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중학생 시절 충청도 시골에서 대구로 전학을 하게 되었고 그때 같은 반 친구의 권유로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군대 전역 후까지 열심히 믿음생활을 이어가던 중 자그마한 사건으로 교회를 떠나며 울산으로 오게 된 이후 교회출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방탕한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떨어져서 살던 저를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주변의 사람들을 보내 계속해서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부하였고 결국 출장을 갔던 현장에서 가스폭파사고가 생겨 크게 다치게 되었습니다. 헬기로 수송이 되고 다리 절단까지 권유받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15개월의 입원과 치료기간은 너무나도 끔찍한,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그런 나날들 이었습니다. 병원생활 중에도 하나님은 저를 부르시기 위해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하나님께로 가지 않고 버티며 오히려 더 좌절하고 제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제가 걸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가 남은 다리로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던 저는 의지가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러다 장애인 콜택시 부르미 운전원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마음 둘 곳이 없어 통기타동호회 활동을 하던 중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마음을 접고 피하려 하였지만 멀리하면 할수록 자꾸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용기내서 고백을 하던 자리에서 그녀는 믿음생활을 하고 있으며 배우자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배우자 기도제목들을 하나하나 듣고 있는데 기도제목은 얼마나 많은지, 그런데 그녀의 모든 기도제목들이 저와 너무나도 잘 맞아서 큰 나이 차이임에도 결혼의 자신감이 생겼고 그녀는 지금의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아내는 동구, 저는 천상, 서로의 집이 너무 멀어 아내가 속한 목장과는 다른 조승문 목장에 아내의 권유로 결혼 전부터 혼자 참석하게 되면서 목장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다들 너무나도 기쁨으로 맞아주시고 모임 때 마다 나누는 삶의 이야기들은 저의 발길을 목장으로 돌리기에 충분했습니다. 결혼을 하면서 아내는 저의 목장으로 오게 되었고, 저의 어머니를 포함한 VIP들이 정착을 하면서 인원이 점점 늘어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분가의 시간이 왔습니다. 박진수 목장으로 분가되어 어머니와 함께 계속해서 목장모임을 함께 하게 되었고 목자목녀님의 집중적인 섬김으로 어머님도, 천사아저씨로 불리는 VIP도 안정적으로 교회생활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분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목자목녀님과 목장식구들의 섬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스케줄이 바뀌는 근무를 하는 직업이다 보니 매주 목장모임에 참석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목장모임에 다녀오면 그동안의 피로가 풀리고 힘들었던 일들이 해결이 되는 경험을 함으로 목장모임이 마냥 좋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되면 자연스레 이야기 하곤 했었습니다.
박진수 목장에서는 두 목원 부부가 한 달에 한 주간씩 돌아가며 예비목자로 지내게 되었는데 두 달에 한 번 돌아오는 그 일이 제게는 상당히 부담이 되었습니다. 매번 목자주간이면 실제 목자처럼 성경도 읽고, 목원들을 위해 기도도 하며 목자마인드로 살아야 하는데 잊어버리고 지내다가 목장모임 날이 되어서야 ‘아, 이번 주가 목자주간이었구나’ 하고 고개 숙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예비목자의 삶을 살던 중 박진수 목장도 분가의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원이 많아지다 보니 12시가 넘어서 모임이 끝이 나고 다음날 새벽출근을 해야 하는 일들이 자주 생겼습니다. 계속해서 분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저는 외면한 체 나는 목자가 되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또 신앙적인 문제로 아내와의 불화도 종종 겪고 있었습니다. 삶 공부 시즌마다 할 수 있는 뭐라도 해보라는 목자님의 권유를 받고 또 아내도 저에게 삶 공부를 같이 해보자고 권면하였지만 저는 직장의 근무 스케줄을 핑계로 생명의 삶만 3번, 1번은 완주, 2번은 격주로 빠져가며 수강하고 그 다음 단계는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원일과 여러 가지 신앙적 문제로 지쳐있는 아내에게 이번 학기에 같이 삶공부를 해보자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부가 같이 새로운 삶을 신청했는데 이미 인원이 다 차서 접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삶이 그렇게 인기 있는 과목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내와 각각 다른 삶공부를 신청하게 되었는데 아내는 기도의 삶을, 저는 경건의 삶을 접수했습니다. 그런데 경건의 삶은 새로운 삶을 이수하지 않으면 수강하기 어려울 거라는 연락을 받고 사실은 새로운 삶을 신청하고 싶었으나 인원이 다 차서 어쩔 수 없이 신청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추가로 새로운 삶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새로운 삶은 첫 시간부터 너무나 좋았습니다. 조기접수마감 될 만 하더군요. 주일은 격주 휴무로 일하는 데 스케쥴을 바꿔가며 삶공부에 도전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식사 중 아내는 뜬금없이 ‘여보 미국갈래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하여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니 휴스턴 서울교회 평신도 세미나 가지 않겠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분가는 둘째치고 평신도 세미나라도 다녀와 보라는 목자목녀님의 권유도 있었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알아보니 여기도 접수가 마감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국내로 발길을 돌려 전주 기쁨 넘치는 교회 평신도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우리 부부는 즐겁게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사실 아내는 그동안 영어학원 부원장으로 여러 문제로 힘들어 하고 있던 시기였고 그래서 머리도 식힐 겸 다녀오자고 출발했는데 휴스턴이 아닌 전주에 우리를 위한 예비하심이 있었습니다. 강사 목사님께서 출석을 부르시면서 기동석 목자님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목원입니다, 하니 목자 안하실거에요? 하십니다. 그렇게 저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홈스테이에서 만난 부부는 목자가 아님에도 자원하여 가정을 열어주신 목원 부부였습니다. 아내와 학원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하며 전주로 갔는데 너무 신기하게도 그 부부는 영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젊은 부부였습니다. 그래서 강의 후 두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현재 학원문제에 대한 상당한 해결점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런저런 소소한 공통점들이 많아 서로가 참 신기해하며 2박3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별 기대 없이 머리 식히러 갔던 평신도 세미나에서 목자로 자원하는 마음도 억지로 주시고, 아내의 기도제목이었던 일들도 해결이 되어 나가고, 또 그곳에서 섬겨주시는 모습들에 감동이 되고, 섬김을 받았으니 또 다른 섬김으로 흘려보내자는 아내의 말에 저희 부부도 우리 교회 평신도 세미나 때 목원으로 홈스테이 가정을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목자 가정만 신청을 하게 되어 있었고 신청기일이 지난 줄도 몰랐는데 마침 홈스테이 오픈 가정이 부족하다는 소식에 얼른 자원하였고 한 목장에서 목자부부와 저희부부 이렇게 두 가정이 홈스테이를 하게 되는 일도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다들 목자도 아닌데 어떻게 홈스테이를 하냐며 대단한 듯이 말씀하셨지만 보고 배운대로 그저 따라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리기 전에 배운 것을 최대한 빨리 실습해보는 것이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말이 피부로 와 닿게 되었습니다.
목자목녀님은 그 이후 별다른 분가의 푸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말그대로 평신도세미나만이라도 다녀와라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저희 부부는 자연스럽게 분가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정말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흘러갔습니다. 억지로 떠밀지 않으시고 자연스럽게 준비시켜주시고, 자원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드리고 그동안 섬김과 사랑의 실 예를 잘 보여 주신 조승문, 이숙화 목자목녀님, 박진수, 김현숙 목자목녀님께 감사드립니다. 보고 배운대로 그대로 잘 섬겨보려고 합니다. 기도로 함께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병아리 목녀, 김정심입니다.
저는 1남3녀 중 장녀로 어릴 적 이웃집 식구들과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산동네 판자촌에서 힘들게 4남매를 키우시던 부모님은 일요일 오전 아이들이 없는 시간이 나름 여유로운 휴식 시간이셨는지도 모르겠고, 또 일찍 일어나 간식이라도 먹고 시간을 보내다 오니 재미삼아 다니라고 보내셨나봅니다. 그런데 제가 신앙심이 생겨 중학생이 되고도 계속 교회를 간다고 하니 불교집안의 맏며느리이신 엄마의 반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타이르시기도 하고, 야단도 치시고 급기야 매까지 들며 반대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져 몰래 교회를 가기도 했다가 안가기도 했다가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학업의 스트레스를 종교생활로 푸는 것이 딴 길로 빠지는 것보다 낫다 싶으신지, 그리고 여자는 시집가면 남의 집 사람이라고 제가 계속 교회 다니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간섭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집사님, 권사님들의 행동에 이해가 안가는 부분들도 있었고, 대학물을 먹으면서 성경의 진리들이 다시 생각해보니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나름대로 판단을 해버리게 되었고, 그러면서 부모님의 반대가 없는데도 자연스레 신앙생활이 게을러져 지인들에게는 신앙에 너무 고지식하지 않은 나름 쿨한 크리스천의 이미지로 세상과 교회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대 중반에 아빠가 지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교회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지인을 따라 다시 나가기 시작한 교회가 나중에 알고 보니 구원파로 분류된 이단이었습니다. 그러다 그 당시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이소영 목녀님이 어린이 영어 예배 캠프에 도우미 교사로 같은 회사 선생님들을 섭외하여 저도 도우러 갔다가 영어예배 교사로 봉사하며 시민교회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담임목사님의 설교말씀이 너무 딱딱하게 다가와 요즘 시대에 저렇게 설교를 하시면 안 믿는 우리가족들은 교회에 오라 소리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농담과 위트 넘치는 말솜씨로 방송에도 나오는 목사님도 계신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세상물이 많이 들어있었던 모양입니다. 설교도 안 믿는 사람들이 들음직하게, ccm 찬양 가사도 가요인 듯 아닌 듯 그렇게 가사를 써서 들음직하게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여전히 쿨한 크리스천임을 자처하며 말이죠. 그런데 시민교회가 목장모임인지 뭔지를 하기 시작하면서 싱글이었던 저는 그나마 정착한 교회에 오히려 더 소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20대 후반에 교회를 옮기게 되어 아는 청년도 없고, 청년예배에 소속도 되어있지 않고, 주일예배만 드리고 있었는데 영어예배 교사들마저 목장모임 때문에 교사모임이 줄어들어 혼자 싱글이었던 저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지냈습니다. 그러던 저에게도 어느 날 목장이라는 곳을 가게 된 계기가 생겼습니다. 엄마가 무릎 수술을 하게 되었고 대학병원 의사분이 그때 당시 집 가까운 동구에서 목장모임을 하신다기에 엄마 전도목적으로 청년목장이 아닌 장년목장에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는 청년목장 자체가 없기도 했고 사실 목장을 통해 친분을 쌓아 수술할 때 혜택이라도 볼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수술은 커녕 시술도 안하고 목장식구들의 기도로 엄마 무릎이 낫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엄마의 신앙생활이 시작되었고, 셋째 동생도 시민교회에, 둘째도 집근처 다른 가정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저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면서 남편이 소속된 목장으로 옮겨갔고 절에 다니시던 시어머님도 목장에 참석하시면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인데도 배울 게 많다시며 박진수 목자님, 김현숙 목녀님 칭찬을 얼마나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저희 목장에서 신앙생활하시면서 그 삶이 많이 변하신 천사아저씨와 그 베트남 며느리,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 아들은 교회가게 해도 자신은 아빠의 제사를 모셔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다닐 수 없다고 하던 우리 막내, 남동생까지도 그동안 누나들과 엄마가 목장, 목장 하는 걸 보면서 시민교회에 그리고 집 가까운 목장에 한 번씩 출석하고 있습니다. 아빠는 비록 돌아가셨지만 모든 식구가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목장모임을 통해 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목장이 가진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작년 가을 평신도 세미나에 다녀오게 되면서, 들음직한 재밌는 설교가, 종교적으로 부담없는 감미로운 찬양가사가 전도에 그렇게 큰 기여를 하지 못함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엔 딱딱하고 지루하게 들렸던 담임목사님의 설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의 적용점을 찾아주는 살아있는 설교임이 깨달아져 뭔가 다른 목사님들과는 다르다, 내가 시민교회에 다니는 것이 참 복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신기한 것은 평신도세미나가 열렸던 전주 기쁨넘치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강의를 듣는데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같으신 분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200km 남짓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도 마치 우리교회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두 분에게서 뭐랄까 본질에 충실한 말씀의 깊이가 느껴진다고 하는 것이 제게 있어서는 가장 최선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영혼구원하여 제자 삼는데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에 초첨을 맞추어 모든 일들을 하고 있는 그 작은 교회가 신선하면서도 우리교회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배운대로라면 우리 목자목녀님이 참 잘해오고 계셨구나, 우리 시민교회가 참 잘해오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한번 제가 시민교회 성도임이, 박진수 목장의 목원임이 감사했습니다. 저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시민교회로 불러주신 것도, 이렇게 목장에서 섬김을 받을 수 있던 것도, 평신도세미나로 인도하신 것도, 무엇보다 그런 깨달음을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있는 은혜였습니다. 분가쪽으로는 거부할 것도 수긍할 것도 없이 자연스레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목녀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저는 남편의 신앙생활을 늘 탐탁지 않아 했었는데 오히려 분가시점이 되니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남편이 아닌 제가 도저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삶공부와 평신도 세미나 이후 남편은 제가 알던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이미 목자감으로 준비가 되어 있었고, 분가식은 오늘 하지만 분가는 이미 하여 목장사역을 하고 있는 중인데 목자역할을 너무도 든든히 해주고 있고, 이제는 삶공부 전도사가 되어 여기저기 삶공부를 추천하고 다닙니다.
학원에서 저의 오른팔 역할을 해주고 있는 이지표 자매는 분가해서도 여전히 든든한 오른팔 역할을 해주고 있고, 분가하고 나서야 목장에 꾸준히 참석하며 급속도로 성장을 해주고 있는 천사아저씨의 아들 조성배 형제도 목자의 오른팔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아내인 베트남 자매도 한국말이 많이 늘어 소통이 한결 쉬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목원으로 생활할 때는 그렇게 목장에서 할 말도 많고 기도로 풀어가야 할 일도 많았는데 목녀가 되고 나니 할 말이 오히려 없어졌습니다.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목녀사역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쿨한 크리스천으로 살 때는 교회는 그저 나 자신의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가는 곳이었습니다. 이기적 평안이지요. 하지만 목장생활을 하면서는 마음의 평안을 넘어선 삶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웃과 공유하는 이타적 평안과 기도응답, 영혼구원하여 제자삼는 실제가 있었고, 본질에 충실하며 순종하니 나머지는 부수적으로 채워지는 경험들을 해오고 있습니다. 장녀로 리더로 살아보니 순종하는 것만큼 쉬운 일이 없다는 것도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하나님께, 남편에게, 교회와 세상의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복된 길임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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