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20807 기쁨과 분노 (빌립보서 3:1-12) | 조회수 : 428 |
작성자 : 교회사무실 | 작성일 : 2022-08-10 |
바울 사도는 예수님과 성도들 때문에 기뻐하였다. 본문 1절에서는 특별히 ‘끝으로’라는 표현으로 더 강조하면서, 신앙의 결과가 기쁨으로 완전하고 복되길 원하였다.
하지만 갑자기 본문 2절에서는 분노의 말씀을 전한다. 바울사도는 기쁨과 함께, 주 안에서 기뻐하되 잘못됨이 없는 안전한 신앙을 위하여 조심할 것 3가지를 말씀하신다. 이는 삼가하라, 확신을 가지라, 봉사하고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은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를 쏟으신다. 믿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교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을 향해 분노하신다. 그 사람이란 유대인으로써 예수를 믿게 된 사람(선민의식이 강한 사람),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인정하지만 그 위에 율법과 계명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는 증거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좋을 것 같지만, 교만과 외식에 빠질 위험이 있다.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언제나 자기의 착한 면만 볼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재판관 행세를 하며 해를 끼치게 된다. 바울 역시 자신이 아는 것만 지켰고, 자기가 잘하는 것만 잘 하는 재판관이었으나, 결국 자신 안에 욕심과 탐심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 앞에 거꾸러지게 되었다(롬 7:7).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속에 불만과 비판거리가 생길 때, 내가 율법주의에 빠진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그에 반해 기쁨이 되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성도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사람(성령에 대한 체험),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사람(예수님을 향한 올바른 태도),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사람은, 예배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롬 6:14, 엡 2:15). 하지만 성경은 율법이 선하다고 말씀하신다(롬 7:12). 율법의 반대는 은혜이다. 은혜란, 값 없이 주시는 선물과 사랑이다. 즉, 성령님이다. 하나님의 법을 이루는 것은 내가 아닌 성령충만한 상태로 이끌리심을 받아야 한다(롬 8:4).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율법과 계명에 저촉되지 않는다. 말씀, 기도, 회개, 순종을 쉬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는 자이다. 기회가 될 때 마다 자기 고백의 간증이 필요하다. 나의 변화된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변화를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랑해야 한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회개는, 내가 주인 되었던 과거의 태도를 바꾸어 주님께 구원을 의지하는 것이다. 바울은 본문 4-12절을 통해 이를 말씀하신다. 바울은 완전한 유대인이요, 열심과 성과가 큰 자였다. 하지만 그 자랑할 만한 것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에는 방해요 배설물이 되었다고 고백한다(7, 8절). 가진 것이 많고, 건강하며, 잘 되는 사람이 예수를 깊이 있게 믿기 힘들다.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8절). 예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 너무나도 귀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첫째로, 그리스도를 얻게 되며,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게 된다. 우리를 계속 괴롭히는 것은 죄책감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심판에서 건져주셨다. 내가 가진 의는 결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9절)만이 하나님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둘째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죽은 교훈이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살아 계시면서 나와 함께 하시는 삶의 역사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 되시는 삶을 살게 된다.
셋째로,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 죽고 말지만,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가 계속 드러나는 삶을 살게 된다. ‘사람은 육체와 정신으로 살아가지만, 죽음에 임박하게 되면 영적으로 살아갑니다.’(이어령, 마지막 수업). 고난을 본받는다는 것은, 스스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고난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다.
내가 자랑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 안에 사는 것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처음 믿는 자세로 돌아가고, 하나님과의,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은혜를 구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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