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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故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 조회수 : 307
  작성자 : 박재준 작성일 : 2024-06-10

                             故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

비켜라, 육군 5대장성 박 병장 제대다!” (그땐 그랬다).

백골부대로 불리는 보병 제3사단 18연대에서 3년을 복무했다. 스물일곱, 한물간 나이에 옛 직장인 한전 서울화력발전소에 복직하고 보니 눈앞이 막막했다. 우선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는 부모님의 끈질긴 결혼 독촉에 답해야 헸고, 오매불망 꿈꾸었던 법조계 진출의 미련을 어떻게 버릴까 하는 것도 고민거리였다. 장남으로서 집안을 건사해야 한다는 책임감 하나가 이 모든 것을 일거(一擧)에 잠재웠다.

곧 간부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질 것이고, 주위 선후배들의 시험 준비 분위기가 나를 자연스레 이 대열로 끌어들일 것이다. 같은 팀원 정00씨가 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이웃동네(성동구 중곡동)의 새집 2층을 소개해줘 곧장 계약을 맺고 단출한 이삿짐 보따리를 옮길 수 있었다.

집주인 박성남 씨는 동갑네기여서 그런지 나를 따뜻하게 대해줬다. 어색한 분위기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서로 흉금을 터놓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 분의 전공이 그림이라는 것, 화가로서 촉망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눈치로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전공분야가 서로 달라 나는 회화에는 별 관심도 없었고, 특히 이 분의 선친이 유명세를 탄 고() 박수근 화백이라는 사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당시는 사회적으로 회화분야가 각광을 받을 때도 아니었고, 많은 화가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을 자주 보아 온 터라 동정심이 일던 때였다.

가끔 안방을 마주하는 화실(작업실)에 들러 그의 작품 얘기와 예술철학을 귀담아들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 안방 벽면에 걸린 그림 한 점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알고 보니 고 박수근 화백의 최대 걸작품 꽃피는 시절(1960년 작)이었다. 이 그림은 미망인이 둘째 아들 박성민 씨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작품이었다.

기억이 다소 흐릿하긴 해도 당시의 가격이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이라 했으니 나 같은 문외한에게는 황당한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한번은 화실에서 이것저것 작품을 살피는데, 불현듯 초상화 한 점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실물보다 더 잘 그렸다고 칭찬을 하니 곧바로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화가가 사실적 그림을 실물같이 그리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합니다이 말은 그 뒤로 이들의 작품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감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휴일에는 집 앞 빈터나 골목길에서 동네축구를 하며 호연지기를 다졌다. 땀 흘린 뒤에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신문지 한 장으로 주반(酒盤)삼아, 날두부에 양념장으로 안주하고, 막걸리를 걸치면서 소일하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깊어가고 아름다웠다.

나의 설익은 품평 한 마디에 즉석에서 대형 캔버스(canvas)를 내동댕이친 일화나 마가렛 밀러 여사의 기증품 관련 브로크 개입 사건 따위는 지면 사정상 화롯불에 잠시 묻어둬야겠다...

1년여 시간이 흘러 나도 새색시를 보게 되었고 신접살림을 차리는 동안 풍성한 인생 얘깃거리를 많이 만들었다. 또 그 해는 간부시험에 합격 하고 3개월 후 본사(특수사업소)로 전근을 가게 되어 용산구 한남동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이후에도 둘 사이에 왕래는 가끔 있었다. 그러나 딸아이가 태어난 데다 원자력부서로 자리를 옮기게 되어 캐나다, 미국 연수를 갔다 와야 했고,나중에는 남쪽지방(월성원자력)에 안주하는 바람에 둘 사이는 자연스레 멀어져갔다.

풍문에, 박형도 3대에 걸쳐 화가의 길을 걷고 명성 또한 얻었다하니 얼마나 기쁘겠소. 예술의 혼(DNA)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가 봅니다. 아무래도 보금자리 집터가 장풍득수(藏風得水)를 품은 명당인 것 같고, 덤으로 그 기운이 나에게도 떡고물처럼 떨어진 것 같소이다. 나 역시 소싯적에 접었던 꿈의 바통을 아들 내외가 이어받아 율사(律士)가 됐으니 홍복(洪福)을 받은 셈이지요. 서울 천만인 가운데 우리가 만난 것도, 2층 방에서 밤새워 공부한 덕에 간부시험에서 합격을 맛본 것도, 신접살림까지. 보이지 않는 손의 덕분 아니겠소.

남은 생애에는 그간 잃어버린 고리를 다시 이어 옛정을 나누기로 하고 여기서 줄일까 하오. 멋쟁이 박형! 건승하소서!“

                                                                                   2024610일 박 재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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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

박재준2024.06.10 10:09
본 수필은 지난 1월 초(2024,1,5) 울산제일일보에 "인생힌담" 칼럼에 실린 것이며
대중매체인 관게로 특정종교 색채는 배제하여 완곡하게 '보이지 않는 손 '등으로 표현함.
김창훈2024.06.11 08:52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인 박수근 화백의 아드님과 인연이 있으셨군요. 저는 이중섭과 함께 박수근 화백이 한국 미술계의 큰 별이라고 생각합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박재준 집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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