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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년 전, 백건우의 울산 연주 조회수 : 320
  작성자 : 박재준 작성일 : 2024-06-25

             20년 전, 백건우의 울산 연주

시니컬(cynical)하게 웃다의 우리말은 어쩌면 씨익 웃다가 적절할지 모른다. 세상 살다 보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런 처지에서 나오는 웃음이다.

고등학교 다니던 딸아이가 피아노를 전공 한답시고 연습에 몰두할 때인 약 20년 전의 일화다. 딸은 어릴 적부터 소위 절대음감인 것을 조금은 타고 난 모양인지 지도교사나 이웃 분들이 곧잘 칭찬을 해주곤 했다. 애비는 막걸리 집 젓가락 장단에 일가견을 가진 게 고작인데, 딸아이는 피아노가 목표라니. 이 무슨 난데없는 삼시랑에라도 잡혔나 해서 온 집안이 초비상이었다.

아파트 아래윗집도 시끄러운 피아노 연습소리에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급기야는 딸아이더러 다니던 교회의 자투리 시간대에 매달리게 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부족한 연습시간에 안달이 난 딸아이는 눈덩이처럼 스트레스만 쌓여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난데없는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가 재능기부 성격의 지방순회공연 일정에 따라 울산에 오게 된 것. 클래식 애호가라면 일부러 시간과 돈 내어 서울도 마다 않고 달려갈 판에 이런 횡재라니.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딸아이와 아내를 위해 거금(?)을 쾌척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부러 연주회가 시작된 지 반시간쯤 지나 도착한 나는 잠시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혹시나 하고 공연장 안으로 살짝 발을 들여 놓는 순간 흠칫 놀랐다.

놀랍게도 행사용 포스트도, 입간판도 하나 없이 말끔히 치워졌기 때문이다. 아니 이럴 수가. 혹시 엉뚱한 장소인가 의심 하면서 살금살금 계단 2층 옆문으로 살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백건우씨는 다행히도 연주삼매경에 빠져있었다. 휴우~하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무대에서 가장 가까운 북쪽 윙(North wing) 맨 앞줄자리에 터 잡았다. 얼마나 가까운지 연주자의 숨소리까지도 들릴 듯 했다.

공연장 내부는 대충 이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대 중앙에는 피아노 1대와 연주자가 있었고, 관객은 1층 앞좌석 가운데만 오밀조밀 몰려있었다, 양쪽 윙의 객석과 2층은 빈 공간뿐. 대낮같이 밝은 내부조명이 썰렁한 분위기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키는 듯 했다.

그분의 연주에는 쉼표가 없었다. 하지만 솔직히 내겐 연주에 별로 흥미를 못 느끼고 엉뚱한 잡생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변이 일어났다. 연주자의 손이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가 싶더니 이내 춤추듯 날아다니는 게 아닌가. 한동안 딱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악보도 없이 내리 2시간가까이 건반에만 매달리다니! 평생연습의 보람이거나 천부적 재능으로 입신의 경지에 오른 덕분이거나. 감격은 일순간 정신까지 혼미하게 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이 만든다고 했던가!

얼마 후 기이하고 황당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내 생각에, 피아노 앞쪽에서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나와 흥이 났는지 놀고 있었던 것. 당연히 나의 눈은 오로지 고양이의 일거수일투족에 꽂혔으며 저놈이 무슨 기상천외한 일을 벌일까기대했지만 얼마 후 유유히 무대 뒷편으로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관객들이 이 장면을 봤는지 안 봤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마감날짜가 임박해도 입장권 판매가 저조하면 할인행사를 하던지, 아니면 복지차원에서 무상 관람자를 초대해서라도 좌석을 메꾸어 주는 게 연주자에 대한 예의 아닐까? 관객 몇 명 앞에서 세계적 인사가 연주하게 한다는 게 울산시민의 문화의식수준을 떠나 주빈(主賓)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못 갖춘 것이 아닐는지?

돌아오는 길에 우리 식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어쨌든 딸아이의 전공이 자연스레 간호학으로 바뀐 것이 지금도 묘한 웃음 씨익으로 남았다.

2024625

世日 박재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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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

박재준2024.06.25 10:10
20*** 12월 7일 울산제일일보 "인생한담" 칼럼에 기고 된 글이며
약간의 수정이 있음. 보잘 것 없지만 재미로 보세요..
박재준2024.06.25 10:13
죄송합니다. 년도가 2018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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