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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하나님의 시간표(時間表)대로 조회수 : 272
  작성자 : 박재준 작성일 : 2024-08-22

                   하나님의 시간(時間表)대로

                  Before even time began, my life was in His hands.

기독교가 나의 인생에 자리 잡은 것은 기독교재단의 미션스쿨(고교)에 입학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교과과정에 성경(聖經)이 포함되었고 이론과 교회 출석률(出席率)을 합산하여 점수를 매겼으므로 좋은 결과는 애당초부터 얻지 못했던 것이다. 주말에는 가끔 시골(경북, 청도)로 내려와 농사일도 돕고 돌아올 땐 양식(반찬포함)을 가져와야 했으므로 불가분 교회에 불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참 딱한 것은 전교 1등 학생이 성경과목 점수만 에 머무른다는 사실은 교무 회의 시에 심각하게 거론(擧論)될 정도였지만, 용케도 졸업 할 때까지 교내 톱스타자리만은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뒤돌아보면 체계적이지 못하고 주입식, 강제적인 학점위주로 가르친 교육방식이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어져 버린 양떼들이 많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곤 한다. 가까운 동기(同期)들이나 동문회 전체를 놓고 봐도 기독교인으로 남은 자가 몇 명 안 된다는 사실이 이 가설을 기분 좋게 뒷받침한다.

운 좋게도 졸업과 동시에 한국전력에 입사(入社)는 했지만 하나님 품은 떠난 지 이미 오래였다. 그 무렵 많은 고교 동문들은 일자리와 대학진학을 동시에 꿈꾸고 있었고, 대학이 지천이다 보니 대학 가는 것이 유행처럼 번져 있었다. 그래도 장남인지라 부모님 생활비며 동생들 학비는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대학진학의 꿈은 일찌감치 접었고, 직장생활에만 충실 하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복무기피(忌避)를 생각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병무청 끄나풀(브로커)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입영연기(入營延期)30세까지 계속하면 제2국민역(보충역)으로 신분 변경이 된다는 논리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고 비록 늦게나마 군대로 강제 징집된 것에 감사 하고 싶다. 병무행정 부정사건이 터져 온 나라가 벌집 쑤신듯했고,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본사 감사실에서 즉시 논산훈련소 입소하지 않으면 해고(解雇)된다는 최후통첩장이 날아들었다.

정상적으로 24살이면 3(36개월) 군 생활을 청산하고 제대하는 나이지만 이제 졸병(卒兵)으로 입대하게 되었으니 팍팍한 군대가 탈영(脫營)내지는 총기사고까지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유혹 하고 있었다. 보병 제 3사단 18연대 3대대 본부중대에 배속 받고 말로만 들었던 철의 삼각지 철원 남방한계선(鐵柵線)에 정보병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고된 졸병생활에 층층시하 고참(古參)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것 같았고 하찮은 말 한마디에도 즉각 시행 외에 변명이 있을 수 없었다. 오합지졸의 집합소라 개인의 잘못으로 한차례 전체기합(몽둥이 타작)은 오히려 편안한 밤을 보장하였으니.

이런 가운데 잠시나마 민간인 냄새가 그리웠고 신앙심은 없었지만 예배시간만큼은 군 막사를 떠나 바깥교회당에서 심신의 편안함을 맛 볼 수 있었던 것은 비신자(非信者)들에게는 선망(羨望)의 대상이었다. 당시 육군본부에서는 야심차게 전군 신자화(信者化)에 목표를 두고 말단부대에까지 채근을 했다. 어느 날 우리 부대에도 군종(신도담당사병)의 손에 이끌려 연병장에 집결하여 합동으로 군목(軍牧師)1명에 의해 합동세례를 받게 되었다. 수 백 명의 장병을 마당에 앉게 하고 목사님의 집례순서에 따라 단상에서 기도로 세례를 베풀었고 이후로 자연스레 세례교인으로 명명(命名)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 성경을 처음 접()하고 군대생활을 통해 세례(洗禮)까지 받았지만 정작 믿음이라고는 겨자씨만큼도 없었던 엉터리(날나리)교인이었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이 흘러 다시 회사에 복직했다. 19805월 캐나다(Canada) 기술연수를 마치고 월성원자력에 부임한 뒤로는 가까운 읍천 교회 창립에도 참여했다. 집사(執事) 직분을 얻었고 아들딸도 주일학교에 등록시켰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할까교회생활에 적응하며 목사님(임 상률)의 주도면밀한 가르침에 익숙해져 갈 때 나의 마음속에 못된 마귀새끼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참소(讒訴)하기를

정말 세례 받았어?”하고 물으니 그만 묵묵부답 할 수밖에옛 생각이 떠오르고 또한, 성경 속에서 세례란 단어만 나오면 또 얼굴을 빼꼼히 내밀며 가짜 세례교인. 성찬식(聖餐式)에서도 양심에 부끄럽지 않니하고 다그쳐 물을 땐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수년의 세월이 흘러 해결방책을 찾기 시작했다. 친구 다니는 교회에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세례를 받고 돌아올까 아니면, 시골고향에서 새신자로 등록하고 세례를 받을까, 최후수단으로 아예 딴 교단으로 이적(移籍)을 하고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 할까 등등 온갖 망상에 시달려 온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 수련회에 초청하는 업체관계자들의 간곡한 부탁에 처음에는 건성으로 고려해 보겠노라고 답()은 했지만 점차 행사 날짜가 가까워 올수록 마음의 갈등의 폭은 커져만 갔다. 손주 녀석의 유치원 등. 하교를 누가 맡을 것인가? 특히나 34일간의 장기공백을(사위한테 휴가를 요구 할 수도 없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유치원 방학기간이 잇따라 발표되어 이 고민은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출발 당일 설레는 마음에 잠도 오지 않았고 혹시 늦을세라 일찍 도착하여 배정받은 10호차에 자리 잡고 알 찬 배움의 기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전국을 달구던 살인더위도 충남, 공주 수련원내에서는 거짓말같이 가을기운의 분위기가 감돌았고 프로그램 마지막 날 천재일우의 침례 행사가 눈에 번쩍 띄었고 일순간 꼭 받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201383일 아침6, 작성한 침례신청서를 들고 줄을 길게 서서 차례로 야외 풀장에 들어가 대기 하고 있던 목사님의 안수를 시작으로 동시에 좌우 2명의 도움으로 몸이 완전히 뒤로 젖혀진 상태로 푹 잠기고 몇 초 후에 올려지는 예식(禮式)이었다.

물위에 올라오는 순간 찰거머리 같은 마귀가 영원히 사라짐을 보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든가 50여 년 세월의 쳇바퀴를 돌리게 하신 뒤 하나님의 시간표(時間表)대로 오늘의 진정한 기쁨의 진수(珍羞)와 찬송이 터지게 하신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自由)케 하리라는 말씀같이 양심에 거슬림이 있으면 결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값 비싼 시간의 대가를 치루고야 말았던 것이다. 평생에 마귀에게 종노릇한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천국의 참 모습을 이 땅에서도 맛 볼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성도들의 정성어린 기도(祈禱) 덕분인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하며 고백수필로 보답코자 한다.

할렐루야 아멘!

                                                     20240822世日 박 재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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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1

박재준2024.08.22 12:36
울산제일일보 '인생한담' 칼럼에 기고되었던 수필이며,
보질 것 없지만 재미로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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