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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90623 고난의 때를 준비합시다 (누가복음 22장 24절 – 38절) 조회수 : 1178
  작성자 : 교회사무실 작성일 : 2019-06-21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신 예수님께 십자가는 바로 한 발 앞에 있었다.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셨다. 전쟁의 준비는 평화의 때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와 같은 고난의 때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Ⅰ. 누가 크냐는 논쟁 (24-30절)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팔자가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서로 자리 다툼을 하기시작했다(24절). 고난과 배반이 예고되고 있는데도 제자들은 서열다툼에 여념이 없다. 예수님의 죽으심 보다는 그분이 세우실 “나라”(16절)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리스도를 정치적 군주로, 그 나라를 눈에 보이는 나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듣고 싶은 말씀(나라)만 듣고 그것을 자의적으로 취했을 뿐, 들어야 할 말씀(고난)은 듣지 않았다. 말씀을 오해하고 오용하는 곳에는 주의 나라와 뜻은 없고 자기 주장과 사리사욕만 있다.
주님은 높아지고자 하는 제자들을 향해 이방인들의 권력자들처럼 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셨다(25-27절). 천국의 질서는 이 세상의 계급 질서와 다르다.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도 다르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다. 그런고로 우리는 세상의 계급 질서를 그대로 교회 안에 받아 들여서도 안 되며,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의 기준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까지 적용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세상의 높은 사람과 교회의 높은 사람은 다르다.
예수님은 자신과 더불어 모든 시험을 통과한 제자들에게 나라를 맡기겠다고 말씀하셨다(28-29절). 그런데 그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의 보상이 아니라 천상의 보상을 바라야 한다. 이 땅에서 헌신의 대가를 바라지 말자. 하나님의 나라는 내려놓음을 통해 얻게 되는 역설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큰 자가 될 수 있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되려면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야 된다. 그러므로 큰 자가 되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구나 원하면 큰 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하늘나라 백성이 누리는 복이다. 세상에서 큰 자가 되는 것보다 하늘나라에서 큰 자가 되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잠시 존재하지만 하늘나라는 영원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큰 자는 잠시이지만 하늘나라의 큰 자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Ⅱ. 베드로의 부인 예고 (31-34절)

예수님은 이제 시몬을 부르시며 그가 영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있어서 그를 위해 기도하셨음을 말씀하시고, 그에게 나중에 돌이켜 형제를 굳게 하라고 권면하셨다(31-32절). 예수님은 사탄의 집요하고 거센 시험 속에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탄의 공격에 자신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신에 대해서는 괘념치 않으시고 장래의 헌신을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믿음을 되찾고 형제를 굳게 세우는 자로 회복될 수 있었다. 닭 울기 전에 그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수님은 아셨지만, 그를 향한 기도와 기대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그 사랑의 기다림이 그를 다시 온전한 자리로 회복시킨 것이다. 기도 없이 이길 수 있는 시험은 없다. 기도 없이 이룬 일은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속된 영광을 얻는 자리를 탐하게 만든다. 우리는 일시적인 절망을 영원한 늪으로 볼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다시 일으키신다. 그리고 축복의 통로로 쓰실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오히려 주님과 함께 죽기까지 하겠다고 장담하였다(33절).
베드로는 자기의 감정을 과신했던 것이다. 그것이 베드로의 허점이었다. 베드로의 약점은 감정적이고도 격정적인 데 있었다. 세상에 감정같이 변하기 쉬운 것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감정같이 믿을 수 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의 이성이나 의지까지도 감정같이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하면 그때 세상은 진짜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것이다. 감정은 언제나 근사해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거품이다. 감정과 인격은 다른 것이다. 감정은 어디까지나 감정이다. 감정이란 간사한 것이기도 하다. 감정에는 다분히 속임수가 있다. 신앙은 감정이나 말이 아니라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나의 말과 삶이 불일치하다면 침묵 속에 기도하면서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성급한 말의 헌신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헌신으로 나아가자, 조급하면 넘어지지만 겸손하면 다시 일어설 것이다.

Ⅲ. 전대와 배낭과 검 (35-38절)

이 말씀은 주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후의 제자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이제 성만찬은 끝나고 출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이제 원수들이 칼을 갈며 이를 갈고 있는 험난한 세상을 향해 나가야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대와 배낭과 신발 없이 전도 여행을 떠났어도 부족한 것이 없었음을 상기시키신다(35절).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36절). 그래서 전대와 배낭 그리고 검도 준비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이제 만나게 될 상황은 예수님이 함께하셨던 상황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에 필요 없던 것들이 이제 필요하고, 전에 포기했던 것들이 이제 준비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불법자로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37절) 제자들은 아무도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검에만 관심을 두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불법자와 동류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닥쳐올 앞날의 환난에 대처할 만반의 준비를 종용하셨다. 장차 어두움이 빛을 삼키는 때가 임하게 됨을 알려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강력한 영적 공격에 대비할 것을 촉구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한 제자들이 ‘검이 두 개 있다’ 보고하자, 주님은 족하다 대답하셨다(37-38절). 여기 족하다는 말씀은 ‘됐다’ 는 의미다. 검을 내놓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이 한심스럽다. 주님의 나라는 검으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용기와 역경을 감수하는 인내와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 필요하다. 주님은 영적 태도를 준비하라고 하신 것일 뿐 십자가를 거부하시려는 마음은 없으셨다. 고난의 때에 우리에게는 실제 검이 아니라 성령의 검이 필요하다. 준비된 고난이라면 상황을 바꾸려 하지 말고 고난을 이길 영적 능력을 준비하자.
전대나 주머니나 검은 행동과 실제 생활을 의미한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체험이요 영혼의 비밀이다. 심령의 평안이며 샘솟는 기쁨 같은 것이다. 영혼의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신앙은 동시에 행동이기도 하며 실제 생활이다. 세상을 향해서 나가는 믿음이요 이웃과의 관계 속에 있는 믿음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머니도 준비하고 전대도 마련하고 검도 가져야 했던 것이다. 신앙생활은 행동이다. 그래서 돈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하고 여행가방도 필요하고 검도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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