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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유엔이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제 4화 격랑의 한반도1 | 조회수 : 1097 |
작성자 : 동문수 | 작성일 : 2014-12-24 |
제4호 2014년 12월 22일
C. 한반도 분할과 한국전쟁과 그의 유산
2차대전이 끝나감에 따라 세계를 둘러싼 식민지들의 분할 문제가 곧 승리하게 될 힘있는 국가들 사이에 주요 협상문제로 떠올랐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 점진적으로 독립절차를 밟아가려는 저의를 가지고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1943년 일본의 패색이 짙어갈 무렵 연합국들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해서 “적절한 때에”진행 것을 합의했다.
1945년 미국은 38선을 두고 한반도를 두 개로 나누는 결정을 하고 미국의 영향력하에 두면서 다른 쪽은 소련이 통제하도록 했다.
이 협정을 이행하기 위해서 미국은 25,000명의 병력을 남한에 보냈다. 그들은 종종 분노와 저항을 받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은 1945년 8월에 소련군 25군단을 북한에 보내서 Soviet Civil Administration으로 정착시켰다. (AHRC25 CRP1 ENG 95)
일본이 한국을 떠난 일은 돌발적이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자주그룹과 인민그룹 등이 한반도 전체에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나타났다. 미국은 확고하게 이러한 그룹들을 억제시켰으나 반면 소련은 이들을 통치의 중심세력으로 키웠다. 소련인들이 평양에 도착했을 때 한국민족주의자의 지도자인 조만식은 북조선에서 가장 저명한 정치가 였었다.
그는 독립준비를 위하여 남 평안 위원회를 결성했다. 북한에 파견된 소련군 중에는 “한국계소련인”이라 하는 조선족이 있었는데, 1860년 말경에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이주해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왔거나 최근에 일본의 압력이 강해지자 만주로부터 흘러 들어간 게릴라 출신들이 있었다.
이 한국계 소련인 중에 33살의 게릴라 영웅인 김일성이 소련군 대위로 군 장교가 되어 있었다. (AHRC25 CRP1 ENG 96)
소련은 한편으로는 조만식을 지도자로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유사시의 대안으로
김일성을 후보자로 선정해 놓고 있었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은 소련군에 의해서 첫 번째로 대규모 집회에서 공개적
으로 발표되었다. 소련 군 장군인 레베테프는 그를 국가적 영웅이며 뛰어난 게릴
라 지도자라고 소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행사에서 연설하는 3명의 북한사람 중 단지 한명일뿐이었다.
그는 조만식처럼 가장 선두에 서지 못했다. 조만식은 소련이 세운 첫 번째 가상 정부인 이북 5개 도의 수장이었다.
1945년 12월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모스코바에서는 미국과 영국과 소련의 외무장관 회의에서 5년간 한국을 신탁 통치할 것을 합의했다. 민족주의자들은 서울에서 이 결정에 반대했다. 마찬가지로 조만식은 1946년 1월에 신탁통치 안에 사인을 거부했다. 그는 바로 감옥으로 보내졌고 1950년 10월에 사망했다. . (AHRC25 CRP1 ENG 97)
1946년에 Soviet Civil Administration은 지방 정권을 세웠다. 김일성을 북한인민위원회의 잠정적 수령으로 했다. 북한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남한과 달리 미국이 받는 저항보다는 적은 저항을 받았다.
1946년 잠정적 인민위원회는 김일성이 사인한 토지개혁법을 제청했다. 일본인 재산으로 되어있던 것과 대지주의 개인 소유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예전의 소작인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다. 북한에서의 토지개혁은 일반적으로 성공을 거뒀고 새로운 통치자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1946년 8월에 잠정적 인민위원회는 산업을 국유화했다. 기술적으로 일본인이 가지고 있고 한국인이 공동 소유했던 것들을 몰수했다.
국가 문화와 교육을 향상시키는 노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1947년 북한은 첫 번째 경제계획을 발표했다. . (AHRC25 CRP1 ENG 98)
권력의 상부에서 초기에는 수십 년간 당파싸움에 물들여졌던 일들이 계속되었고,
김일성은 그의 지지자들로 힘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만주에서 일본에 대항하여 싸웠던 젊은 게릴라들과 그 그룹을 상위 직에 앉혀놓고서 권위에 위협을 가하거나 도전하는 사람들을 추방했다.
1946년 전 소련관료인 방학세는 보안대의 정치보위 국의 수장으로써 정치경찰과 Counter-intelligent를 처음으로 조직했다. 방학세는 북한 정치경찰을 세운 사람이다. 김일성의 게릴라 그룹이 아니면서 한국계소련 그룹으로 왔던 그였지만 평생 동안 충절을 지켰다. . (AHRC25 CRP1 ENG 99)
김일성이 가장 잘 알려진 게릴라 전사였기는 하지만, 그는 그의 개인 기록의
증진과 북한 통치의 특성상 필요로 하는 개인숭배를 일으키는 방법 등을 통해서
그리고 국가가 정보, 의사와 표현의 자유를 내 세움으로써 입지를 강화하기 시작
했다.
전 북한의 최고 인민회의 의장을 지냈던 황장엽씨는 설명하기를
“김이 88보병 여단에서 한국인 가운데 선택된 이유는 그의 젊고 잘 생긴 외모 때문이었다. 그의 경험은 그 당시의 중국 지도자와는 일치하지 아니했다. 러시아군 대위를 전설적인 북한의 영웅으로 떠 받히기 위해서는 과대 선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당시 한국은 일본 통치하에 압제되었던 아픈 경험을 막 겪고 나서였다. 이 시점에 과대선전은 좋은 기회가 되었다. (AHRC25 CRP1 ENG 100)
1946년에 모든 정치적 그룹들이 북한 노동당에 통합되었다.
북한군은 조직화되고 강화되었다. 그들은 훈련되었고 최초에는 경찰과 철도경비
대로 위장했지만 소련군에 의해서 훈련되고 무장되었다.
북한이 1948년 9월에 제정될 때 김일성은 정부의 수장으로써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되었다.
소련군은 북한에서 많은 군을 철수시켰다. 1949년 북한은 의무징병제를 제정했고 15만 명에서 20만 명의 군인을 10개 보병부대로 조직화했고, 1개 탱크사단과 1개 공군사단을 만들었다. 이러한 힘은 시민전쟁을 끝내고 중국에서 들어온 전쟁으로 잘 단련된 군인들로 인해 더욱 보강되었다. (AHRC25 CRP1 ENG 101)
1945년과 1948년 사이에 분단된 한반도는 군사력으로 재 통일을 성취하려고 하
는 양측에 의해서 38선은 엄중히 경계를 이루었다.
1948년 소련과 미국이 철수한 이후에 긴장과 군사적 도발은 증가되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이 최종적 승인 하에 38선을 넘어
90,000명의 인민군을 투입하는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김일성은 한반도 전체에 그
의 리더십을 주장했다. 이는 남한의 불법적 리더십과 남한에 있는 동조자들의 반
란을 기대하는 것을 기반으로 했다.
최초에는 인민군은 100,000명도 안 되는 남한 군을 쉽게 제압했다. 수도 서울은 삼일 만에 정복되었다. (AHRC25 CRP1 ENG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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