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권후도 대행목자님을 소개합니다. | 조회수 : 981 |
작성자 : 이종관목사 | 작성일 : 2015-07-16 |
권후도 목자님은 손영호 목장에서 분가하였습니다.
다음은 목자님의 간증입니다.
저는 지독히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자라 일찍 결혼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제 고난은 시작되었습니다. 성인아이같은 남편은 자주 술을 마셨고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한 결혼, 또 제가 선택한 사람이라 원망도 할수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의지할 곳 없는 저는 친구를 따라 점집도 다녀보았으나 누구하나 제 인생을 인도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언니를 통해 전도되어 남편 몰래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무서워 성경책, 찬송테이프등을 숨겨왔던 제가 교회다니고 있음을 고백하고 싶어졌습니다. 며칠을 기도하다 남편에게 알리자 예상대로 시어머니까지 불러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 저는 정신을 잃어 쓰러졌고 겁이 난 남편과 시어머니는 언니를 불러 30분거리의 교회로 갔습니다. 달리는 차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몸이 뒤틀리는 저를 주무르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간 교회에서 목사님의 기도로 새벽에서야 깨어났고 그때부터 자유롭게 교회에 다녔으며 제사문제도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참 변하지 않았습니다. 살려만 주면 다 하겠다던 남편의 옛 습관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비정상적인 행동은 더 심해졌으며, 믿음이 없고 심약한 저는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남편은 본인의 고집대로 고향으로 이사 후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물질을 벌었으나 잦은 외박등으로 세상쾌락에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두 딸과 저는 교회가 좋았고 금요철야 등 기도회는 다 다녔으며 큰딸은 피아노 반주로 저는 방송실 봉사로 교회는 저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온종일 교회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예견되었던 사업의 실패, 부도는 곧 닥쳐왔습니다. TV에서나 봤던 빨간딱지가 붙었고 전국을 누비며 사업을 했던 터라 검은양복을 입은 조직폭력배들과 술집주인이 찾아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저로 하여금 일용한 양식은 벌게 해주셨으며 그곳에서 마지막 직장이 장애인복지관 지체협회였습니다. 저는 장애인에 대한 남다른 관심도 사회복지에 대한 지식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최종 부도가 나자 저는 신용불량자가 되었고 살던 집까지 경매가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친정오빠가 경매 브로커를 데리고 와 ‘동생이 집은 있어야 되지 않겠냐’며 처리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저는 두 딸과 남편을 두고 경주 친정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4학년이었고 큰딸은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렇게 분리된 저는 친정에서 교회를 다녀야했으나 친정어머니는 부끄러운 딸이기에 집근처에 있는 교회는 극구 말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네교회로 인도하셨고 저는 등록하기로 용기를 내어 목사님을 뵙고 저의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잠시 후 그날 꼭 가보고 싶었던 내와동산에 갔으며 곧 소망재활원에 입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먼저 품게 하셨던 소망재활원에서 저는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기도회도 찬양대도 만들었습니다.
입사하여 한달 쯤, 새벽이면 대변을 싸서 얼굴이며, 코, 입속에도 넣고 온몸에 묻히던 여자아이는 어김없이 입에도 코에도 넣고 있었습니다. 버둥거리는 아이를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제 입에서 “하나님 제가 꼭 이짓해야 합니까”라는 불평의 말이 나왔습니다. 늘 과분한 직장임을 생각했는데도 말입니다. 그 때 슬라이드처럼 스쳐가는 영상이 처음 교회를 다녔을 때 서울대 수석졸업했던 의대생의 간증이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엄마가 거지를 데리고 와서 목욕을 시키고 자신의 설빔을 주라고 하셨기에 지독한 냄새 때문에 막대기로 옷을 벗겼던 그 졸업생... 그 졸업생은 한국에서의 성공도 버리고 미국의 가난한 흑인촌에 들어가 의료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거지가 “나”였다고 했답니다. 온몸으로 오물을 튀기며 소리지르는 여자아이 앞에서 저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굴복을 했습니다. 그렇게 소망재활원에서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또 제 삶이 변동이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원목께서 상담을 요청 하셨기에 저는 주간보호센터에의 이동일거라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주간보호센터가 무엇하는 곳인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 뜻에 순종하게 하게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인도함 속에 온 시민교회와 주간보호센터는 또 다른 인생의 도전이었습니다. 시민교회에서의 예수영접, 삶공부등의 제자사역은 신앙의 정립을 가져왔고, 목장은 저를 지탱케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목장모임에서 삶의 고백, 중보기도, 섬김, 서로를 돌아보는 격려등은 가정교회와 평신도 사역에 무지했던 저에게 끊임없는 재생산의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지난 겨울 우연히 그 여자아이와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소망재활원에서 퇴소 후 딸과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으며 눈물로 감사함을 표현했습니다. 한웅큼의 정신과약으로도 해결하지 못했던 아이를 안고 기도하던 시민교회선생님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의지할 곳 없는 부모님이 누군가의 사랑과 헌신의 기도로 주님을 만나 새 삶은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주간보호센터 부모님들도 눈물로 얼룩진 인생이 주님을 의지하며 소망을 가지고 새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소망재활원 시절 하나님께서는 니가 내일하면 니 두 딸 내가 키워주마 하셨기에 딸아이에 대한 걱정을 모두 주님께 맡겼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임신 중에도 늘 삶을 포기하고 싶었기에 큰 딸은 심장 수술을 했었고 숨이 차 잘 뛰지도 못할거라 했었지만 하나님은 클라리넷을 전공하는 아이로 자라게 해주셨습니다. 또 이불속에서 숨죽이며 울었던 저는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의 통곡은 두 딸을 떠나온 엄마로서의 가슴 아픔도 위로받게 되었습니다.
어둠속 긴 터널 같았던 제 인생, 늘 자살을 기도했고 남편을 피해 수없이 도망쳤던 지난세월, 꿈속에서도 쫓아와 괴롭혔던 남편, 그러나 지금은 돌아온 탕자가 되어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순종의 마음을 주셔서 분가를 하려고 합니다.
더운 여름에도 주간보호센터 주방에서 조리를 해주신 목녀님, 밤늦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부족한 잠을 떨치고 달려와 봉사해준 목장 식구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런 헌신과 섬김이 모여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먼저 영혼구원의 애통함을 주셔서 순종하게 하시고 또 함께 동역할 목장 식구들이 있기에 감사합니다. 가정교회는 평생 동안 붙들고 가야할 사역이라 하셨기에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교회를 이뤄나가길 소망합니다.
내 상처 때문에 철저하게 이기적이었던 딸이 오래전 정신을 잃어 교회에서 나음을 입은 저에게 ‘하나님 만나고 왔냐’고 물으셨던 친정아버지, 주님을 모르기에 곤고하기 짝이 없는 내 이웃들에게도 섬김의 본을 보이길 결단해 봅니다.
지금까지 변함없는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기도해주신 손영호목자님, 매순간 최선의 것으로 섬겨주셨던 오현경목녀님,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던 목장 식구들, 목장은 관리가 아니라 섬김이라고 강조해주시고 제 사명이 무엇인지 기도해보라고하신 담임목사님,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
전체댓글 6
이전글 : 상하이 비전트립 준비 모임 | |
다음글 : 백만불짜리 웃음 | |
이전글 다음글 프린트하기 | 목록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