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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쉰셋 나이에 딴 한식조리사 자격증 | 조회수 : 369 |
작성자 : 박재준 | 작성일 : 2024-06-29 |
쉰셋 나이에 딴 한식조리사 자격증
달력에 ‘조리사 발표일’이라고 큼직하게 적어놓은 뒤부터는 그 날이 기다려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감은 점차 꼬리를 내렸고, 당일에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기까지 했다. 지난번에 일어난 차량접촉사고로 찌그러진 문짝을 고치려고 지인이 운영하는 수리센터에 차를 맡기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전화로 흘러나온 동료 학원생의 목소리는 전혀 뜻밖이었다. “반장님, 축하합니다!” 그 순간, 3개월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기쁜 소식을 식구들에게 알리려고 전화를 돌렸다. 딸은 벌써 알고 있었다. 말은 안 해도 온 가족이 이심전심으로 합격을 기원했음이 분명했다. 한식조리사 자격증에 도전하게 된 사연은 이랬다.
한창 젊은 나이에 기술을 배울 겸 미국, 캐나다 쪽으로 여행 갈 기회가 많았다. 그 기간이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반이었으나 회사의 명(命)인지라 도중에 걷어치울 수도 없었다. 그 바람에 체류기간 내내 먹는 문제로 사투(死鬪)를 벌여야 했다. 매일의 메뉴는 빵, 베이컨, 감자칩, 콩, 과일통조림 등 거의 인스턴트식품 일색이었다. 나 같은 ‘된장 체질’에는 통 맞지 않아서 반 고문수준의 일상이 이어졌다. 캐나다 공항에 도착한 때부터 연수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매 끼니와의 처절한 싸움은 끝내 한(恨)으로 남았다.
북미(캐나다, 미국)지역은 이민 천국이다. 시장에는 오대양 육대주에서 생산된 온갖 식재료(食材料)가 차고 넘쳐 만국박람회 같았다. 우리의 대표주자 김치도 빠질 리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리법을 몰라 하나같이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에피소드 한 편을 소개한다. 1979년 2월 초 생애 첫 해외나들이에 묵을 곳이 하필이면 캐나다 북쪽 한적한 시골지역인 포리스트(Forest)호텔이었다. 어느 휴일 아침, 호텔 전체에 난리가 났다. ‘시체 썩은 냄새’로…. 직감적으로 나는 일행 중 성미 급한 누군가가 공용주방에서 ‘청국장’을 끓였음이 분명했다. 특히나 중앙 냉·난방시설이라 호텔 구석구석에 냄새를 골고루 뿌려주어 투숙객들이 기겁을 할 수 밖에! 뒤늦게 달려온 총지배인(superintendent라 칭함)이 길길이 날뛰며 ‘어글리 코리언’이라 질타했고, 우리는 유구무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혹독한 반성문을 쓰고 마무리한 사건이었다.
매 여행 후에 꼭 다짐하는 한 가지 각오는 거창했다. 귀국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한식요리’학원에서 배우리라 마음먹었지만 번번이 공수표로 돌아갔다. 원자력설비 관리라는 막중한 책임이 조금의 여유도 허락지 않았고, 일과 후에는 학원 시간표와의 괴리도 한 요인이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흐른 1998년12월 중순, 응어리도 못 푼 채 정년을 맞았다. 밤새 기와집 몇 채를 짓고 부수면서 새벽을 맞았다. 그러다가 ‘음식나라’라는 요리학원에 이름을 올렸다. 학원생들의 인적구성은 20대 초반부터 50대 초반까지 폭이 넓었다. 원장님의 인사가 끝나자마자 “반장을 최연장자로 해도 되느냐”고 반 협박(?)조로 제안하자 곧 바로 박수 추인이 이루어졌고, 완장은 운 좋게도 내 차지가 되었다.
교과과정은 하루 4시간, 주 5일, 3개월간, 이론과 실기로 편성되었다. 이론과목은 공중보건학, 식품위생학, 영양학, 식품학, 조리과학, 원가계산 및 식품위생법 등이었고, 실기과목은 대부분 궁중요리가 근간인 53개 개별조리였다. 엄청난 가짓수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여성들은 대부분 요리명이나 재료정리, 조리순서가 대부분 몸에 배어 있었으나 나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생소하다 못해 도대체 우리나라에 이런 이름과 요리가 과연 존재하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하였다. 요리 명부터 외우기 시작해서 마지막 정리단계인 그릇에 담기까지 처절하게 자신과 싸움을 계속해야 했고, 예습·복습을 통해 암기와 숙련도 높이기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조리실습 중 겪은 에피소드는 숱하게 많았다. 가장 애타고, 힘들었던 것은 ‘고명 만들기’였고, 특히 ‘계란지단부치기’는 난제 중의 난제였다.
어느 날 오후, 혼자서 텅 빈 조리대 앞에 섰다. 머리띠를 두른 채·…. 달걀 2판(60개)을 노른자, 흰자를 분리한 뒤 프라이팬과 싸움을 시작했다. 초보의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서서히 탄력이 붙었고, 급기야는 계란지단이 뒤집개 없이도 공중제비를 돌다가 넙죽 엎드려지게 하는 묘기가 펼쳐졌다, 드디어 달인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시건방을 좀 떨면 눈 감고도 척척….
나중에 보니 쓰레기통은 실습의 흔적인 습작품으로 한가득 찼고, 비로소 “야호”!소리가 튀어나왔다.
시험당일에는 각자 위생복과 조리도구를 지참했고, 요리마다 정해진 재료를 활용해 교과서대로 시간 안에 완성하고 작품을 제출해야 했다. 우리 학원에서는 응시생 37명 중 9명이 합격해 합격률이 24%로 낮았다. 이 IMF 난국에 소시민의 생계를 도우려는 마음은 있는지 없는지(?) 꼭 낙방을 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는 억하심의 발로는 아닌지 부아가 치밀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자력을 주무르던 자가, 그것도 쉰셋 나이에 앞치마 두른 칼잡이가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 일로 나는 원자력업계에 불가사의한 전설 하나를 더 남긴 셈이 되었다. 지금은 비록 ‘장롱면허’에 불과하지만 내 딴엔 언제든지 혼자서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으니, 이것도 내 복의 하나라 해야 할지….
남녀불문하고 중·고교 교과과정에 기본 요리코스를 추가하자. 또한 글로벌시대, 백세시대를 맞는 작금에 본의 아니게 홀로되는 노인이 많을진대 기본적인 먹고사는 노하우 프로그램을 개발해 실시토록 하면 어떨까?
‘풍요 속에 빈곤’이라고, 넘쳐나는 식재료를 두고도 요리방법을 몰라 굶거나, 인스턴트 식품류에 기대어 영양실조를 자초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2024.6.29. 세일 박 재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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