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홈  >  시민공동체  >  설교요약
  제  목 : 20180114 믿음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누가복음 7장 1절 - 17절 ) 조회수 : 1172
  작성자 : 교회사무실 작성일 : 2018-01-12

‘신앙’ 이란 ‘의지하고 순종한다’ 하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믿음생활이라고도 부른다. 믿음은 예수님의 권위(권세와 능력)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크다 작다 믿음이 자라간다 자라지 않는다 하는 것도 예수님의 권위를 얼마나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요4: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마8: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막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요2: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약4:2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예수님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안 믿는 것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금 인정하는 사람은 조금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권위를 크게 인정하는 사람은 크게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449장찬송). 하나님은 믿음의 삶을 사는 성도를 기뻐하고 칭찬하시며 그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Ⅰ. 진정성과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기(1-10절)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백 명의 로마 군병을 인솔하는 백부장은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로마는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그가 신임하는 종이 중병에 걸려 죽게 된 것이다.

1>진정성이다. 당시에 종은 주인의 소유에 불과했다. 그저 사물로 취급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그는 종을 진심으로 소중하게 대했다.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2) ‘사랑하는 이’ 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뜻은 ‘존중하는 이’ 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수하에 있는 일개 종이지만 그는 그 종까지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그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구하기까지 하였다. 한국인은 약소국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민족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들을 얼마나 차별하고 학대하는가? 백부장의 진정성이 우리를 자성케 한다.

2>겸손이다. 자신은 주님을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6). 피지배 민족 사람들이 추천할 정도로 그는 유대인들을 사랑하고 섬긴 인물이다(5). 그럼에도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이중적 이해가 중요함을 본다. 인간은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용서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 이것이 은혜 의식이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자신은 자격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늘 그의 곁에 머물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좀 더 낫고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할 때 교만해지기 시작한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것을 자주 잊어버린다. 이것이 교만이다. 결국 교만은 착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만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어리석은 죄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교만하면 망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 앞에 겸손하게 살겠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교만은 우리의 믿음을 유혹한다. 믿음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믿음은 사람 앞에 아닌 하나님 앞에서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데 오늘날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믿음을 자랑한다. 믿음은 계급이 아니다. 믿음은 높고 낮음의 표시가 아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는 증거다. 먼저 믿었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많으니라(마19:30). 주님은 겸손한 믿음을 기뻐하신다. 백부장은 로마의 군인으로 힘과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앞에 자신이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고백하였다. 사랑하는 종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간구한 이 사건은 겸손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주님은 이스라엘에서도 이렇게 겸손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며 칭찬하셨다(9). 우리 역시 주님이 감동하시는 겸손한 믿음으로 살아가자.

3>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을 쉽게 생각하고 쉽게 잃어버린다. 믿음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그랬다.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그분의 능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은 너무 쉽게 무너지곤 하였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갑자기 두려워하며 물에 빠지자,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 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은 날마다 입었다 벗었다 하는 옷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 가슴에 새겨진 고백이자 확신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백부장의 이런 자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Ⅱ. 주님께 인격적으로 반응하기(11-17절)
이후에 예수님은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셨다. ‘나인’의 뜻은 ‘기쁘다’ ‘즐겁다’ ‘아름답다’ 하는 뜻이다. 그런데 그 성의 의미와는 달리 나인 성은 과부의 한 아들의 장례로 인해 슬프고 힘들고 어두운 분위기였다. 예수님이 그곳으로 들어가셨다. 나인성이 참 나인성이 되게 한 기적이 주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셨다. 예수님은 먼저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다(13). 가까이 다가가시고 관에 손을 대셨다(14). 예수님이 청년아 일어나라 명하시자 청년이 일어났다. 백부장의 경우에는 그가 먼저 예수님께 다가섰지만 나인 성 과부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셨다. 과부도 지인도 아무도 예수님께 요청한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관을 멈춰 세우시고는 울지 말라 말씀하셨다. 우리가 골방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지나치지 않으신다. 우리가 말도 못하고 속으로 울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울음소리를 들으신다.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일 때, 절망적인 상황일 때, 기도할 기운이 조금도 없을 때,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미신다. 그때 우리는 반응하면 된다. 그때 우리는 순종하면 된다. 이제 다 끝났고 회복될 수 없다고 고집 부리지만 않으면 된다. 왜냐하면 믿음은 주님의 말씀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상대방이 내게 믿음을 줄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든 실망을 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시 미쁘신 분이다. 내가 먼저 다가가든 주님이 먼저 다가오시든 믿음으로 반응하자. 우리에게는 다 하나님의 능력은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능력은 과대평가하는 성향이 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크신 이름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알면서 내가 작아지고 내가 작아지는 그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과 권세가 크심을 알아서 큰 것을 구하시고 큰 것을 기대하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는 역사가 계속일어나기를 기도드린다.

 "

  이전글 : 20180107 예수님처럼 (누가복음 6장 39절 - 49절)
  다음글 : 20180121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 (누가복음 7장 18절 - 35절 )
이전글 다음글          프린트하기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