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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80506 가라! 가서 전하라! (누가복음 10장 1절 - 16절) 조회수 : 1729
  작성자 : 교회사무실 작성일 : 2018-05-04

열두 제자를 파송하셨던 예수님이 이제 70명의 제자를 세우셔서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파송하신다(1).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기도 제목과 전도 방식을 살펴보면 제자의 사명은 무엇이며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는지 배우게 된다.

Ⅰ. 지금이 추수할 때이다(1-3절)

1.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다. 열두 제자에 70명까지 더하면 최소한 82명의 증인들이 있었던 셈이다. 장족의 발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일꾼의 부족하다고 말씀하신다(2). 준비된 일꾼에 비해 추수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이었다. 예수님은 이 시대를 바라보시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우리는 조금 더 열심을 내어야 한다.

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예수님은 세상을 멸망 받아야 할 세상이 아니라 추수하여야 할 세상으로 보신 것 같다. 세상이 악하면 악할수록 추수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점점 악해져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옳고 그런 것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악과 선도 구별이 되지를 않는다. 음란의 영이 판을 친다.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추수할 것이 많은 세상이다.

1>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 악한 세상을 추수할 것이 많은 세상으로 보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연민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불쌍히 보셨다(마9:36).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이 멸망 받을 저주의 자식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구원 받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로 보였다. 세상은 악하다. 그러나 세상을 분노의 마음을 갖고 보아서는 안 된다. 연민의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은 전하는 교회가 되고 전도하는 신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분노하지 말고 먼저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연민의 마음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2>일꾼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 - 예수님은 추수할 때라고 말씀하시면서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명하셨다. 목자나 사역부장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할 사람을 찾다가 없으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도가 중요한 사역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교회나 다른 목장에서 일꾼을 보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자원하는 사람이 많이 생기게 해달라는 의미일 것이다.

3.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내시면서 안타까워하셨다. 어린 양과 같은 제자들을 이리 같은 세상 가운데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둘씩 보내신다. 서로를 지키고 돕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있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Ⅱ.이렇게 하라(4-10절)

이 칠십 명의 제자들에게 전도의 지침이 주어진다. 몸을 가볍게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사로운 인간관계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느 집에 가든지 평안을 빌어야 했다. 그 집이 평안을 받을 만하다면 평안을 누릴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들에게 평안이 돌아갈 것이다.

누군가 그들을 대접하면 그것을 당당히 누리되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지는 말아야 하였다. 그리고 모든 병자를 고쳐 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음을 말해야 한다. 증인들에게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있다. 증인들이 세상의 방식을 따라서는 안 된다. 증인은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럴 때 당당하고 자유롭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Ⅲ. 증인을 영접하지 않으면(10-16절)

13.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고라신과 벳새다에 화를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13)이 뜻밖이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예수님의 입성을 거절했던 사마리아인의 마을을 조용히 돌아가셨던 예수님이(9:52-56) 증인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매섭게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은 종말론적이다.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이미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 있기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하나님나라에서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치유와 회복이 이뤄진다. 이 땅에서의 복음 전도는 그 완전함을 향한 시작이며 하나님 나라의 증거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이는 그들이 복음을 거절한 이상 그들과 하나님이 상관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행위다(11).

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어느 집에 가든 평안을 빌라고 하셨지만 증인들이 전한 복음 앞에서 중립 지대는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증인을 거부한 것은 곧 그들이 전한 복음을 거부한 것이다.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다. 따라서 증인을 영접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거절당한 자가 느끼는 인간적인 분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자에게 주어질 필연적인 결과에 대한 선언이다.
하나님 앞에서 중립 지대는 없다. 사람은 복음을 거절하거나 받아들이거나 둘 중 한 가지 반응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이지만 결과는 하나님이 정하신다.
교회가 간혹 소심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사람들에게 굽실굽실, 우리 교회 좀 나와 주세요, 우리 약한 교회를 좀 도와주세요, 한다. 주님이 바라시는 모습은 아니다. 교회는 굽실거릴 만큼 비천한 존재도 아니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만큼 약하지도 않다. 교회는 주님의 보호 안에 있고, 제자들은 주님이 동행하는 자들이다. 예법 상의 겸손함은 갖추어야 하겠지만, 비굴하거나 소심하거나 기죽을 필요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일이니 믿음으로 당당하게 선포하자. 예수님이 주신 복음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하고 생명과 같은 복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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