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150705 빌라도의 법정 (요한복음 19장 1절 - 16절) | 조회수 : 1309 |
작성자 : 교회사무실 | 작성일 : 2015-07-03 |
법정은 사람의 죄가 만민에게 폭로되는 공간이다. 죄가 있다면 불안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죄인은 이상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반면에 죄가 없는 사람은 결백이 드러날 것이므로 당당하다. 본문은 2천 년 전 빌라도의 법정에 있었던 죄 없는 이의 당당한 모습을 소개해주고 있다.
Ⅰ. 소동하는 무리
군병들은 예수님께 채찍질을 가하고 가시면류관을 씌웠다. 또 자색 옷을 입히고 손바닥으로 때렸다. 물론 빌라도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고통과 모욕이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 정도로 심문을 끝내려고 하였다.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간 것은 대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대제사장 안나스는 자신의 직권을 남용해서 다섯 아들과 사위 가야바도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바 있기 때문에 종신직이자 세습직인 대제사장이 이미 여러 명이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늘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고 결국 빌라도를 압박해서 예수님께 십자가를 지게 했다. 그들은 무리를 선동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 박았다.
Ⅱ. 잠잠하신 예수님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처참한 모욕을 당하셨다. 흥분한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재판장인 빌라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에 반해 예수님은 잠잠하셨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질문에도 침묵하셨다. 억울함을 해명할 기회인데도 애써서 사정을 말하려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빌라도에게“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다”며 담담히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잠잠함, 그 마음의 평정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서 나온 당당함이다. 죄가 없는 자의 소신이다. 또한 그 자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자리임을 각성한 자의 평안이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때, 진실하게 행동할 때, 자신의 사명대로 살아갈 때 당당할 수 있다.
Ⅲ. 두려워하는 재판관
재판의 최종 책임자는 빌라도였다. 그는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애썼다.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다.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군중들에게 넘겨주었다. 무엇 때문인가? 권력 기득권을 놓치기 싫어서였다. 그래서 옳지 않음을 알면서도 군중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빌라도의 무책임한 모습을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고백되고 있다. 빌라도는 자신이 최선을 다했을지 몰라도, 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력한 재판관 무책임한 사람으로 남았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했음에도 그 판단을 따라 옳은 일을 하기보다 자신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했고,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께 온간 조롱과 모욕을 퍼부었다.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이 이런 고초를 당하신 것은 그분께 권능과 권세가 없어서가 아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왕의 권세를 내려놓고 죄인이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짊어지셨다. 이 대속의 사랑과 희생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아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 감격스러운 일을 기억하며 날마다 예수님께 감사해야 한다.
Ⅳ. 현실에 가려진 진리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를 쓰기도 했지만 자신의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주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 앞에서 가이사가 자신들의 왕이라고 하는 배교의 말을 내뱉었다. 이들은 모두 진리가 아니라 현실을 택한 것이다. 우리도 현실이 진리를 위협하는 상황을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그때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인정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현실의 이익보다 진리를 더욱 기뻐할 때, 예수님을 드러내는 능력이 발휘된다. 비록 지금은 눈앞의 현실이 진리를 가린 것 같아도, 우리는 결국 승리하게 될 진리의 편에 서야 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밝혔다. 그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나면 유대인들에게 만족감을 주어 예수님을 풀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곧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유대인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고소했다가 이제는 임의대로 종교법을 적용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고자 하였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쉽게 기준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셨다.
우리는 자기 계획을 고집하며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살아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 살아가는 자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기뻐한다.
자신의 세상 권세를 유지하기 원했던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그분의 생사를 결정할 권세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권세는 스스로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나에게 영향을 주는 어떤 사람의 권세나 지위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권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세상의 부당한 고난과 조롱도 넉넉히 이겨 낼 수 있다.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할 때 자신의 이익과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권세 아래에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권세에 순복하는 삶을 살아가자. 그러면 하나님의 권세가 우리를 붙잡아 주실 것이다.
중립이 좋은 점이 많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중립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분명히 맞고 분명히 틀리는 것이 있는데“나는 중립이다”고집하면 내가 틀린 쪽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빌라도의 실패는 중립을 지키면 안 되는 위치에서 중립을 지키려 했기 때문에 생겼다. 우리에게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있다. 특별히 신앙생활에 관한 문제이다. 예수님에 관해서, 진리에 관해서 우리는 중립을 지킬 수가 없다. 그런데 빌라도는 끝까지 중립을 지키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그는 진리를 배반하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준 죄로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사람의 행동은 마음속에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죄와 욕심이 있으면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과대하게 포장하거나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움츠려들기 마련이다. 의로움과 진실함 외에는 평안과 당당함을 누릴 방법이 없다. 빌라도 법정의 예수님처럼 우리도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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