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약
•홈  >  시민공동체  >  설교요약
  제  목 : 20190512 예수님, 주저없이 위험한 말씀을 주시다 (누가복음 20장41절-21장4절) 조회수 : 852
  작성자 : 교회사무실 작성일 : 2019-05-10

예수님의 권위 앞에 모든 상황이 평정되었으니(26,40절) 예수님은 조용히 떠나실 법도 했지만 말씀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을 위기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Ⅰ. 사람을 살리는 참된 지식 (41-44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했으니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 수 없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첫 번째 위험한 말씀이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메시아를 지칭하는 가장 대표적인 관용구였다. 잘못된 표현이 아니라 성경적인 표현이었기에 예수님도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허용하셨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단편적인 이해를 교정해 주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다윗보다 선재하셨기에 오히려 다윗의 주가 되신다는 것이다(시110:1).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천지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예수님이 구역을 인용하실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또한 구약을 신봉하고 구약에 능통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무지함을 깨우치시기 위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단지 말씀을 많이 읽고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며 배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깨닫고 순종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우리를 살리는 참된 지식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는 완고하고 교만한 지식이 될 수도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 읽고 배운다. 배우는 자세로, 겸손한 자세로, 성령님의 조명을 구하며 읽고 배워야 한다. 깨달음과 말씀을 받는 겸손한 마음이 중요하다.

Ⅱ. 외식하는 자에게 예비된 엄중한 심판(45-47절)

본 단락은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서기관과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겨냥한 말씀이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은밀한 골방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45절).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공개적으로 하셨을까? 서기관이나 제사장들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예수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인을 섬기고 살리기 위해서지, 자신의 안위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반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은 그들 자신을 죽이는 일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신앙을 변질 및 왜곡시키는 악한 일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그들의 외식을 지적하신 것이다.

무지한 사람들이 “저것이 경건이구나, 저것이 신앙생활의 모범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본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영적 지도자들은 더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하나님은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더 높고 엄격한 기준으로 다루신다. 따라서 그 자리는 함부로 욕심낼 자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맡기고 세우지 않으신다면 우리 스스로 오르고자 할 자리가 아니다.

그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더 긴장해야 한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살펴야만 한다. 부모의 자리, 교회의 직분 등 이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지도자의 자리에 있다면, 혹시라도 내가 외식을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성경에 바리새인이 등장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신앙적으로 잘못된 사람으로 간주하고, 또 자신은 그 범주에서 빼버린다. 그러나 바리새인을 남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누구나 다 바리새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이를 방지할 수 있는가? 바리새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신앙의 잣대를 자신의 내면에 맞추어야 한다. 스스로 낮아지는 연습을 계속해야 한다.

Ⅲ. 과부의 헌신(1-4절)

성전에서 예수님은 부자들과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1-2절). 여기에 인상적인 면이 있다. 부자는 불특정 다수의 ‘부자들’이고 과부는 ‘어떤 가난한 과부’ 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눈에 부자들은 그저 지나가는 의미 없는 배경에 불과했지만, 이 과부는 클로즈업으로 포착된 의미 있는 장면이었다.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했다. 기껏해야 1-2천원 정도의 돈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 여인이 가장 많이 드렸다고 말씀하셨다(3절). 왜인가? 그녀는 헌금만 드린 것이 아니라 헌신도 드렸기 때문이다. 헌신은 소유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은 희생을 담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많은 헌신을 드렸다 할지라도 은혜로 알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

  이전글 : 20190428 신앙의 지지대 (여호수아 14장 6-14절)
  다음글 : 20190526 종말을 대비하는 삶(누가복음 21장 5절 – 19절)
이전글 다음글          프린트하기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