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20230910 십자가를 자랑하라! (고린도전서 1:18-31) | 조회수 : 323 |
작성자 : 교회사무실 | 작성일 : 2023-09-12 |
20230910 십자가를 자랑하라! (고린도전서 1:18-31)
2세기에 살았던 ‘알렉사메노스’라는 15세 소년은 예수님을 믿었고, 누군가 이 소년의 신앙을 조롱하는 낙서를 기숙사벽에 새긴 것이 아직 남아있다. 초기 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는 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도’하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비참하게 죽은 자가 하나님이 보낸 이스라엘의 구원자 그리스도라고 하는 주장은 자가당착이며 헛소리로 여겨졌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유대 땅에서든 이방 땅에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였다.
그러나 십자가는 언제나 기독교의 중심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사함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받게 될 모든 복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가능해진 것이다.
바울은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상반된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세상 지혜로만, 이성적으로만 사고를 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반역의 비참한 결과요 개혁의 실패요 미련함의 상징으로 여긴다. 하지만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성령의 지혜로 사고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은혜요 사랑이요 섬김으로 여긴다. 예수님과 바울이 살던 로마제국 시대에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거북하고 부담스러운 상징이자,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니, 혐오와 경멸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선포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들을 구원하는 능력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이 얼마나 큰 사랑의 하나님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며,악의 세력을 패배시키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참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런 십자가의 능력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상).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지 않은 자는 십자가의 말씀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탁월한 지혜나 선한 행위나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킬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오직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는 자에게만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다.
바울은 겸손한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 자기 생애를 던졌다. 그 십자가를 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로마의 탁월한 ”수사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놀라운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음전도자의 소박한 언어행위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구원하신다. 복음전도자의 입술에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복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던 사람이 복음을 믿는 역사가 일어난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모든 사람들이 환영하진 않는다.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거절하는 두 가지 유형을 보여주는데, 바로 유대인과 헬라인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다. 유대인에게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말은 참으로 거슬리는 주장이었다. 또한 헬라인의 최고 특징은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구하기 위해 내려와서 ‘지혜’를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주장은 참으로 바보같은 소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었다. 십자가에서 저주 받은 자가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말은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유대인과 헬라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듣기 거북하고 미련한 것이라고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부르시고 성령을 부어주신 자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고 구원을 얻었다.
십자가에는 반전이 있다. 십자가에는 역전이 있다. 실패한 것처럼 보인 십자가가 사실은 대성공이었다. ‘패배’처럼 보이는 십자가는 아담의 타락 때에 약속하신 구원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승리’의 자리였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 대부분은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거나 주목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본래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불러서 하나님의 큰 일에 사용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회적으로는 천대를 받았지만 겸손히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을 구원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강하고,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십자가의 약함으로 하나님의 강함을 나타내셨듯이,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못난 자들’을 부르심으로써 부름 받지 못한 ‘잘난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다. 우리 가운데 아직 실패의 경험이나 고통의 상처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분이 계신다면, 하나뿐인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그 사랑의 상징인 십자가를 늘 기억한다면,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고,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을 줄로 믿는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연합시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을 주신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재미로 사는 자들이 되시길 축복한다!
예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자!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이유임을 기억하고,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주목할 때, 드넓고 풍요로운 ‘은혜’의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십자가로 이루신 모든 신령한 복이 가득한 바다 위로, 선장되신 우리 주님과 함께, 평생토록 감사와 기쁨의 항해를 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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