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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유엔이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 제 3화- 우리의 슬픈 역사 조회수 : 864
  작성자 : 동문수 작성일 : 2014-12-16

제3호 2014년 12월 15일

위원회는 “현재의 북한의 인권 상황은 한국민들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 모양이 갖추어졌다고 강조한다.” 유교적 사회구조와 일본 식민지 경험은 오늘날의 국가에서 지배하는 태도와 정치적 구조를 계급화했다.  

강요된 한반도 분리,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량 파괴, 냉전의 영향 등은 고립된 사고를 낳게 했고 외부의 힘에 혐오감을 갖게 했다. 외부의 힘에 대해서 혐오감을 갖게 함으로써 내부에서의 억압을 정당화하였던 것이다.

북한에서 한국민들이 가진 특이한 본성과 광범위한 인권침해행위들은 그 정치시스템의 본질을 바로 인식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시스템은 일인(김정은)에 의한 일당체제 및 정교한 지도 사상과 중앙계획경제에 의해 운영되는 시스템이다.   .(A.HRC.25.63 25)

AHRC25 CRP1 ENG

북한 인권침해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

현재 북한에서의 인권상황은 한국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들에 의해 형성되었다.

유교적 사회구조와 일제 식민 통치 동안 겪은 억압은 오늘날 북한의 정치적 구조와 억압적 태도를 형성하게 하였다. 한반도의 강제적 분단, 한국전쟁 동안의 대량 파괴, 냉전의 강한 영향 등은 격리된 사고 방식과 외부 세력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가지게 하였다.

북한의 특이한 본성과 광범위한 인권침해들은 북한에서의 정권 시스템의 발달을 인식함으로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북한은 당,국가,군대 모두 하나의 가족 왕조가 지배하는 유일정당국가이다. 막스레닌의 이론위에 엉성하게 기초를 둔 엄격한 이념 주의와 광범위한 보안 체제가 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AHRC25 CRP1 ENG 85)

  1. 식민지 통치 전 역사

전근대 역사 과정 위에 한국은 지주층과 학자관료로 구정된 “양반”이라 불리는 소수의 귀족 엘리트가 소작농과 상인과 노동자를 포함한 하위계급층을 지배하였다. 

양반은 대를 이어서 관직에 머물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유교는 본질적으로 사회 통합과 개인 성취에 있어서 엄격한 계급을 고수하는 윤

리 철학 체계이다.

특히 삼강 오륜에서 중요시하는 관계는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부자유친父子有親, 붕우유신朋友有信, 장유유서長幼有序로써 이중 가장 중요한 것

은 부자간의 관계이다.

실제로 나이든 사람과 사회지도층에 대한 존경은 나이에 기초를 둔 오늘날 남북

한에 공존하고 있는 한국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점이다.   

이처럼 여성은 여전히 전통적으로 평등하지 못하게 늘 불리한 위치에 있어왔다.

 (AHRC25 CRP1 ENG 88~89)

B. 일본 식민지 기간 (1910~945)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는 수세기에 걸쳐서 한국과 외부나라 사이에 침공으로

그리고 중국, 일본, 몽고, 만주와 뒤늦게는 러시아, 불란서와 미국과의 친교 등에

의해서 진전되어왔다.

1876년, 일본과 비 우호조약을 맺게 되었다.

한국 개혁자들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미국의 이익과 연대를 이루는 당파들은

고종황제의 왕궁에서 자리다툼만을 일삼고 있었다.

한국반도는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장시키려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외세의

각축장이었다.

1894~1895 청일 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공식적으로 한국을 독립국으로 선언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한국은 중국과 조공의 관계를 청산하였으며, 그래서 일본은

한반도에서 그 영향력을 키우게 되었다.

러일전쟁(1904~1904) 일본이 러시아의 Port Arthur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했다.

이로써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중재하여 Portsmouth, Hew Hampshire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일본의 보호령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1910년 일본은 정식으로 한국을 식민지로 선언했고, 한국인은 왕정을 끝내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요구했다. (AHRC25 CRP1 ENG 90)

일본은 사회와 관련된 것을 포함해서 관리와 경제 체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근대화 개혁을 강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압도적으로 식민지는 부정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한국은 자기 나라 안이지만 일본인들이 정해놓은 엄격한 차별 법의 지배아래 놓여졌다.

한국말을 못하게 했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했다.

일본은 약 700,000만 명의 자국인들을 보내서 정부 활동에 필요한 역할을 하는 상부관리의 자리에 배치했다.

운수, 통신, 산업과 농업분야를 한국사람들보다 한국 내에 거주하는 일본자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이 힘을 확장시켰다.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근대화 작업의 결과들은 개발과 저개발의 패턴형태로 특징지어졌다.

일본이 한국의 개발을 결과적으로 도왔는지 아닌지 하는 질문은 여전히 정치적이고 학구적인 양면에서 고도로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AHRC25 CRP1 ENG 91)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은 서울과 평양을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학생들 및 다른 한국인들의 저항운동을 유발시켰다. 이 비 폭력시위들은 여러 날 동안 연이어 수많은 도시와 마을로 퍼져나갔다. 일본 관료들은 수천의 한국인들을 체포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고문과 비인간적인 구금으로 목숨을 잃었다.(AHRC25 CRP1 ENG 92).

일본은 그들의 대대적 전쟁 노력의 일환으로 한반도에서 주요 산업화를 감행했다. 주로 북쪽에 철강공장과, 제조공장들과 수력발전소들을 세웠다.

많은 수의 한국인구가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떠나야만 했다. 한국인들은 여성과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한반도의 북쪽과 만주에 있는 공장과 광산과 기타 일본회사들에 노동자로 보내어 졌다.

많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 했고 많은 남녀가 강제노동에 징발되었다. 1945년까지 일본의 노동력의 많은 부분이 한국인이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AHRC25 CRP1 ENG 93)

짐작하건 데, 1945년까지 한국 전체인구의 20%가 태어난 곳을 떠나서 이주했고, 11%가 국외로 내 보내졌다. 2차대천후 약 240만 명이 일본에, 약 200만 명이 중국에 그리고 20만 명이 소련에 있었다.

2차 대전 후 일본의 패망 후에 식민 통치는 끝났다.

수백만 명의 이주한국인들은 집으로 돌아갔으나 그 외 사람들은 여전히 일본과 중국과 그리고 소련에 남았다.

이 강제 이주의 유물로써, 이들은 특히 일본과 북 중국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가게 되는 서글픈 역사가 시작되었다. (AHRC25 CRP1 ENG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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