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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유엔이 들려주는 북한 이야기제5화-격랑의 한반도2 조회수 : 948
  작성자 : 동문수 작성일 : 2014-12-30

제 5호-2014년 12월 29일 격랑의 한반도2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남한에 대한 북한의 공격을 냉전에 대한 첫 번째 도전으로 간주했다.

그는 즉각 미군을 배치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유엔 안보리로부터 그의 액션을 승인 받는 방법을 찾았다.

안보리는 우선적으로 미국의 주도하에 북한이 즉각적인 휴전을 하고 삼팔선 이북으로 철수하도록 요구하는 안을

승인했다(3개국 불참 9개국 승인)

소련은 안보리 상임 이사국으로써 Veto하는데 동참하지 안았다. 소련은 1950년 중국에 안보리 신임장을 주는데

참석을 거부했다. 그 당시에는 유엔에서 중국의 자리는 여전히 대만에 있었다.

1950년 6월 27일 트루먼대통령은 미군 공군과 해군에 한국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안보리 83조도 같은 날 승인

되었다. 북한의 남한에 대한 무장공격은 평화에 대한 불이행이다. 그래서 유엔 회원국들에게는 한국과 이 지역에

서 불법적인  군사적 공격을 격퇴시키고 국제평화를 되찾도록 도움을 주도록 요청했다.

1950년 7월 7일 안보리는 나아가 모든 회원국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도록 미국의 주도하에 유엔의 깃발아래

북한에 대항하는 미국과 15개 국가들이 유엔연합군하에 “국제야전군”으로 전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1950년 소련이 안보리에 되돌아 와서 “한국전에 대한 모든 결정”에 Veto를 행사했다.

한국 전쟁에 대한 논의는 유엔 본회의로 넘어갔다. (AHRC25 CRP1 ENG 103)

1950년 8월 말까지 북한군은 한반도의 90%를 장악했다. 그러나 미군 맥아더 장군이 1950년 9월에 인천상륙작전

에 성공했다. 유엔의 지원을 바탕으로 남한 군은북으로 향했고 서울을 탈환했다.

맥아더 장군은 중국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엔을 등에 업은 힘으로 중국 국경까지 밀고 나갔다.

1950년 11월까지 남한 군은 유엔연합군의 지원에 힘입어 한반도의90%를 장악했다. 그러자 공화국은 중국 군 수

십만 명을 보내서 북한 인민군을 보강했다. 그들은 유엔군과 남한 군을 38선까지 물러서게 하는데 성공했다. 북한

은 그 와중에도 전쟁에 있어서의 중국 자위대의 결정적 역할을 최소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군은 나머지 전쟁에 대한 주요 군사적 부담을 수행했다.

북한은 전쟁 동안뿐 아니라 전쟁 이후에 재건과 전쟁 후의 경제를 지탱하는데 받은 외부의 도움을 지속적으로

과소평가 했다. 유엔군에 의한 협력적 공격은 인민군에게는 득보다 오히려 북한지역의 대량의 파괴를 초래하였다.

그 이후로부터, 2년간의 Bitter stalement가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북한에는 세계 2차 대전 때에 태평양 전 지역에 떨어졌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들이 투하되었고 그

로 인해서 한반도의 남북 양쪽 모두 황폐함은 엄청났다. (AHRC25 CRP1 ENG 104)

한국전은 1953년에 휴전했다. 1953년 7월27일 정전 협정이 유엔군사령관인 미군 해리슨 장군과 북한 인민군

일과 중국 인민자위대에 의해서 체결되었다.

이 전쟁으로 한국인 200만 명이 죽었고, 약 60만 명의 중국인과 36,000명의 미군이 사망했으며 기타 영국군 1,000

명, 수백 명의 호주군, 벨지움, 캐나다, 컬럼비아, 이디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네덜란드, 필리핀, 터키인들이 사망

했다.

국제 인권법의 중대한 위반은 양측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미군 역사가 SLA 마살은 한국전을 “세기의 가장 고약한 작은 전쟁”이라고 불렀다.

미국에서는 ‘잊어버린 전쟁”이라고 함. 그러나, 이 전쟁은 전쟁의 희생이 “국가의단련”이라고  김일성이 나열하듯

북한에서는 잊혀질 수 없는 전쟁이다.

북한에서 공식화 하고 있는 역사로써의 이 전쟁은 “아버지의 나라 자유전쟁”으로써 미국이 시작한 것이고, 김일성

은 국가를 방어만 했고 미군에 의해서 황폐하게 된 것이라고 함.

이러한 수사는 몇 십 년간 계속되었다. 예를 들자면 1990년대의 대 기근 때에 미국의 식량구호를 보내자 이는 전

쟁 보상으로 받은 것이라고 주민들에게 설명하곤 했다. (AHRC25 CRP1 ENG 105)

한국전쟁의 유산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휴전협정은 휴전을 3개월 이내에 정치적 회합을 추천했다.

1954년 제네바 회의 때 남한과 북한과 중국과 소련과 유엔군하의 참전국 17개국 중 16개국이 참석했다. 2개월 후

의 이 회담들은 효력을 상실하고 다시 재개되지 아니했다. 총체적 평화조약 같은 건 없었다. 국경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침공과 침입의 공포가 여전히 존재되어 있었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공포가 강렬한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는 비상시국으로 유지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이로써 인

권침해가 동반되는 여건이 자연스레 조성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정치적 반대론자로 인지된 사람을 외세의

지원을 받는 간첩으로 몰아세웠다. 식량과 다른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의 부족을 적대적 외부세계의 탓으로 돌리게

된 것이다.

남한도 역시 아직 완료되지 안은 전쟁의 불안정을 경험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서 일반적 징병과 보안 제도를 활용

하였다.

이러한 보안 방법은 특별히 표현의 자유처럼 존중되어야 하는 시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형태의 제재를 시작하게 된

다. (AHRC25 CRP1 ENG 106)

1954년까지 미국은 유엔연합군으로부터 군을 분리했다. 그리고 한미공동방위조약을 통해서 한국 내에 계속 상주

했다.

같은 시기에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다른 나라들은 대부분 모두 철수했다.

미국은 한국 내에 약 28,500명이 상주하고 있다. (AHRC25 CRP1 ENG 107)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통틀어서 DMZ에서는 매일 총성이 오갔고 900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다.

1967년 북한은 한국을 불안정하게 하려는 의도로 비밀결사를 가동했다.

1968년 북한의 특별군인 124군 31명이 서울에 있는 청와대에 들어가서 박정희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1972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한국의 이후락 정보부장 사이에 한국과 북한은 군사적이나

외부세력을 동원하지 아니하는 평화적인 통일을 성취하자는 합동연설문을 발표했다.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한국의 민간인을 목표로 테러리스트 행동 등을 주도했다. 이 내용들은-

1983년 미얀마 양곤에서 전두환대통령을 암살할 계획으로 저지른 폭탄테러로 21명의 정부요원들이 희생되었고,

1986년에는 김포공항 폭파로 5명이 죽고, 1987년에는 KAL기 폭파로 115명이 사망했다.

이러한 행동들로 북한은 자신들을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시키게 되었다. (AHRC25 CRP1 ENG 108)

이 한국전쟁의 상처는 너무나도 깊고, 아직도 절절하게 느껴진다.

위원회는 이 조사의 과정에서 한반도의 국경 양쪽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고통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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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

이종관목사2015.01.01 11:51
장로님과 함께 평양을 다녀왔던 그 때를 잊지 못합니다.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하여 기도하시며 섬겨주심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저희도 장로님의 조국 사랑의 마음을 본받고 기도하며 섬김과 나눔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깨우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동문수2015.01.03 08:50
유엔 보고서를 읽어 보면서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 처절한 삶을 그리도 오랫동안 견디어 오고있는 그들은 왜 그래야만 하는가? 막연한 연민만 있을 뿐 해결책이 없는데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조금씩 옮겨보았습니다. 목사님의 격려의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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