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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08년 03월 23일_부활절을 넘어 부활의 능력으로 조회수 : 978
  작성자 : 박종옥 작성일 : 2008-03-22
인도에 썬다싱이라고 하는 유명한 성자가 있습니다. 그가 영국을 방문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을 때 유명한 교수가 그에게 핵심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뿌리 깊은 힌두교에 유능한 학자인데 또 힌두교인 인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까?” 썬다싱은 아주 중요한 대답을 했습니다.“그것은 예수 부활 때문에……. 기독교에는 부활이 있기 때문이오. 힌두교나 불교나 인생무상 끝이요. 기독교만이 생명의 종교요. 예수 부활…….”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매년 우리는 부활절을 지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고 기념합니다. 그러나 이제 기념을 넘어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매년 부활절이 다가오지만 삶에 어떤 부활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경험 없이는 부활의 능력을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을 위한 죽음의 경험 없이는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없이 부활의 능력을 맛보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신앙이 실제적이지 못합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고전 15:31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빌 3:10-11에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깨달은 영적 진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 할수록 부활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사서 고생하면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가 더욱 체험되어지고 부활이시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더욱 알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까지도 본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능력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 말입니다. 같은 경험만큼 같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했던 그 부활의 능력을 온전히 알고 싶어서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죽고자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핍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세상의 관점에서 형통한 삶, 편안한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를 거부하라고 말하는 사탄의 소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하는 사탄의 외침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메시야여든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소리지르는 군중의 소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활의 사건은 절망이 전복되는 사건입니다.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모든 절망, 자포자기, 침울했던 삶이 전복되는, 180도로 변화하는 사건입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으시는 사건입니다. 이 능력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시겠습니까?
언젠가 서울의 어떤 목사님이 특새를 하면서 요즘은 고난이 없어서 믿음의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믿음의 야성을 깨우기 위해서는 사서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새벽 야성을 부르짖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제, 세겹줄 기도회가 끝났습니다. 행사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나태한 신앙생활을 깨우고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새벽 야성입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일어나 열방과 민족을 위하여 영적 전장으로 나아갑시다. 이렇게 고백합시다. “우리는 부활을 소망하기 때문에 기도를 쉴 수 없다!”

최수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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