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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130428 김교신을 아십니까? 조회수 : 849
  작성자 : 이종관목사 작성일 : 2013-04-27

김교신 선생은 서슬 퍼런 일제 치하에서 양정고등학교 학생이던 손기정에게

마라톤뿐만 아니라 한국말과 한국 위인들의 얘기를 들려주며

좌절한 식민지 청년의 가슴에 희망의 불씨를 지펴준 선생님입니다.

 

함경도 유교 집안에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란 김교신은 일본 유학 중

일제의 폭력에서 동포를 살릴 구원의 희망을 찾다가 기독교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교회 권력에 의해 목회자가 쫓겨나는 모습을 보고는,

교권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 올바른 신앙을 찾다가,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성서연구회에서 7년 간 배웠습니다.

이 때 함께 한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과 함께

귀국 후 <성서조선>이란 잡지를 시작하게 됩니다.

김교신은 자기중심적인 탐욕의 성취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복적인 서구 기독교의 모습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기독교를 모방하여 열광적이며 몰지성적인 풍조에 빠져있던

기독교인들에게 이성적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미국이나 일본의 기독교가 아니라 조선인의 심성과 동양 정신의 진수라는

그릇에 예수의 정신을 담은 “조선적 기독교”를 열고자 했습니다.

 

김교신은 학생을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전인교육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는 바쁜 교사 생활 중에도 불굴의 의지로 혼자서 시간과 비용을

모두 들여가며 <성서조선>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1942년 이른바 <성서조선>의 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성서조선>은 폐간 당했습니다.

1년의 옥살이를 끝내고 출옥한 김교신은 흥남 일본질소비료 공장에 들어가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 당한 5천명의 노동자들을 위하여 유치원, 학교, 병원 등을 세웠습니다.

그러던 중 발진티푸스가 만연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병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돌보다가 결국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그리도 바라던 해방을 100여 일 앞둔 때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45살이었습니다.

 

김교신의 아래 글 한 편만 읽어봐도, 그가 과연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흥전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서 교회마다 성령의 불이 붙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조선에 희망을 주는 일이 아니었음은 과거에 경험한 바이다.

사회 전반이 기독교적으로 변하여서 시장의 상인들까지도 예수쟁이 행세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이 되는 일도 조선에 희망을 약속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평안도 지방에서 벌써 경험했고 결론이 난 일이다.

또 신학을 하려는 청년이 많다든지, 홀로 전도를 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으로

영혼 구원 사업에 뛰어드는 사람을 보았으니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일로써 희망이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학이나 전도에만 거룩함이 있고 새로운 삶의 희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돼지나 닭을 치더라도 창조의 원리를 헤아리며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이라면

다 거룩한 일이요, 희망이 모든 조선 민족에게까지 미치는 큰 사업이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의 성취나 신령한 사업에 헌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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